“도저히 신뢰할 수 없다”한 글로벌 기관투자자가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 개혁과 관련해 〈한경ESG〉와의 인터뷰에서 비공개로 털어놓은 말이다. 또 다른 투자자는 “기업지배구조 수준이 제품 경쟁력을 따라가지 못한다. 일본처럼 지배구조가 후진적인 기업에는 공개 망신을 줘야 한다”고 비판했다. 한국 기업을 바라보는 해외투자자들의 뿌리 깊은 불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노르웨이 중앙은행 투자 관리(NBIM) 등 주요 글로벌 기관투자자들이 공개적으로 이사회 독립성과 투명성 강화를 반복적으로 요구하는 것도 이 같은 불신에서 비롯됐다. 이들은 한국의 가족 지배형 기업, 이른바 재벌 기업의 지배구조를 여전히 신뢰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표면적으로는 정부가 추진하는 지배구조 개혁 정책에 기대를 보이지만, 여전히 ‘지배구조 리스크’를 한국 기업의 가장 큰 약점으로 꼽는다. 과거부터 이어져온 각종 지배구조 분쟁과 그 과정에서 드러난 소액주주 권리 침해, 불투명한 의사결정 등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는 판단에서다.
삼성·현대차·LG·SK…끊이지 않는 지배구조 분쟁
지배구조 취약성은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에서도 반복적으로 드러났다. 2015년 5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은 출발부터 잡음이 컸다. 당시 삼성물산 지분 7%를 보유한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은 “합병 비율이 삼성물산 주주에게 극도로 불리하다”며 공개 반대를 선언했고, 상당수 개인투자자도 반대에 동참했다. 그러나 국민연금이 캐스팅보트를 쥐고 찬성표를 던지면서 합병안은 가까스로 통과됐다.
합병 이후 불법·부당한 외압이 있었다는 논란은 끊이지 않았고, 국제 중재재판에서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배상하라는 판정까지 내렸다. 소액주주 보호장치 부재, 관치 논란, 자사주·우호지분 동원 등 제도적 허점이 총체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글로벌 투자자에게는 한국 시장의 공정성과 예측 가능성에 심각한 의문을 품게 한 상징적 사례로 남았다.
현대차그룹도 비슷했다. 그룹은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하기 위해 현대모비스-현대글로비스 합병을 추진했지만, 세계 2대 의결권 자문사 ISS·글래스루이스가 모두 반대를 권고하고 엘리엇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결국 2018년 5월 현대차는 합병안을 철회했다. 이후 엘리엇은 현대차그룹에 대규모 특별 배당과 이사회 진입을 요구하며 주주 캠페인을 벌였고, 이는 글로벌 자문사와 국내 여론이 결집하면 대기업의 안건도 충분히 저지할 수 있다는 선례가 됐다. 한국 대기업이 예전처럼 무조건적 우위를 점하지 못한다는 점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LG그룹도 예외는 아니었다. 2018년 구광모 회장 취임 이후 추진한 지주사 ㈜LG와 LX홀딩스 분할 과정에서 미국계 행동주의 펀드 화이트박스는 “총수 승계를 위한 조치일 뿐 주주가치 제고와 무관하다”며 공개서한을 보내 반대했다. 2020년 당시 LG는 순자산가치 대비 큰 폭의 할인 상태였던 만큼 일부 기관투자가와 의결권 자문사도 주주가치 훼손 우려를 제기했다. 결국 정기 주주총회를 통과해 LX홀딩스는 출범했지만, 이후 LG는 자사주 매각, 계열사 구조 재편, 배당성향 제고 등 잇따른 주주친화책을 내놓으며 시장의 우려를 진화해야 했다.
SK그룹도 분쟁의 한복판에 있었다. 2024년 영국계 행동주의 펀드 팰리서캐피털은 SK스퀘어에 자사주 매입·소각, 순자산가치 할인 축소, 포트폴리오 재편, 이사회 개편 등을 요구하며 압박했고, SK스퀘어는 일부 요구를 수용했다. 과거 같으면 정면으로 맞섰을 대기업이 이제는 외국계 행동주의 펀드의 요구를 일정 부분 받아들이는 흐름으로 바뀌고 있다. 이는 글로벌 투자자와의 힘겨루기 국면에서 기업이 더 이상 절대우위를 점하지 못한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해 이창환 얼라인파트너스 대표는 “한국에는 다양한 산업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유수한 기업이 다수 존재하지만, 지배주주의 이사회 장악, 주주 간 이해 상충, 일반 소수주주 보호 제도의 취약함, 낮은 주주환원율 등 후진적 기업지배구조로 해외투자자들이 찾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KT&G, 지방 금융지주, 개인주주까지…확산되는 개혁 요구지배구조 개혁 요구는 해외자본뿐 아니라 국내자본과 개인주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2023~2024년 KT&G에서는 싱가포르계 펀드 플래시라이트가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며 주주행동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IBK자산운용이 추천한 사외이사가 주주총회에서 선임됐다. 이상현 플래시라이트 대표는 주총 직전 본인을 후보로 추천했다가 스스로 사퇴했으며, IBK 측을 지지한다고 밝힌 바 있다. 얼라인파트너스는 지방 금융지주들을 상대로 전문성 있는 사외이사 확충과 배당 확대를 이끌어냈다. 코로나19 이후 급증한 개인투자자도 온라인 주주 모임과 공개 비판을 통해 의결권 행사에 적극 나서며 지배구조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여전히 대기업 스스로 지배구조 취약성을 진단하고 개선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2022년 5월부터 2023년 4월까지 주요 대기업 이사회 안건 7837건 중 원안대로 통과되지 않은 건은 0.7%에 불과했다. 삼성전자·현대차·LG 등 일부 초대형 기업은 최근 5년간 사외이사 반대표가 ‘0건’이었다. 4대 그룹 중 SK만 유일하게 사외이사 반대표가 나왔다. 한국 특유의 사전 조율 문화가 있다고 해도 과도한 수치이며, 사외이사 과반 구조에도 견제·감시 기능이 사실상 마비됐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이사회가 경영진 견제보다 추인에 가까운 ‘거수기’ 역할에 머무른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인 셈이다.
그 결과 합병·분할 등 중대한 의사결정 국면에서 소액주주는 사실상 거부권을 행사하기 어려웠다. 일부 기업은 가문 이익 중심 결정으로 비쳐져 소액주주들이 소외됐다는 불만을 낳았다. 최근 법·제도 개선으로 소수주주권 보호 장치가 일부 마련됐지만, 실효성은 미미하다는 지적은 여전하다.
지배구조 투명성 확보 → 장기 성장성 강화
해외투자자들이 한국 기업에 요구하는 지배구조 개혁 관련 핵심 과제는 단순한 지배구조 개선을 넘어 기업의 장기적 경쟁력과 지속가능한 성장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구조적 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들이 지적하는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 5가지 핵심 과제로 요약할 수 있다.

01 힘의 균형
무엇보다 대주주와 소수주주 간 힘의 균형 확보가 가장 기본 전제로 꼽힌다. 지금까지 한국 대기업 지배구조는 총수 일가 중심의 폐쇄적 의사결정 구조로 운영돼왔고, 이는 소수주주 권익 침해나 배제 사례로 이어졌다. 글로벌 연기금과 기관투자자들은 의결권 집중을 완화하고, 사외이사 제도와 이사회 내 위원회 운영을 통해 소수주주의 실질적 견제력을 높일 것을 요구한다. 이사회가 경영진 견제보다는 거수기 역할에 머무는 현실을 바꾸지 않으면 시장 신뢰를 회복하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02 지배구조 ‘안전판’구축
두 번째는 이해 상충을 조율할 제도적 장치 마련이다. 이사회·감사기구가 경영진과 지배주주로부터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내부자 거래, 사익편취, 부당한 의사결정으로부터 기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준법 감시를 넘어 투자자 신뢰를 지탱하는 핵심 지배구조 ‘안전판’으로 간주된다. 실제 LG화학 배터리사업부 물적분할(→LG에너지솔루션) 당시 소액주주 지분가치 희석 우려에도 지배주주의 의결권으로 강행됐고, 두산밥캣-두산로보틱스 포괄적 주식교환 시도에서도 소액주주 의견이 배제됐다는 평가다. 이러한 결정은 지배주주 이익 중심이라는 인식을 심화시켰고, 국제 의결권 자문사들은 주주권 침해 우려를 공개 지적했다.
03 예측 가능한 승계
세 번째는 경영권 승계 과정의 투명성 확보다. 한국 재벌 기업은 오너 일가 중심의 지분·지배구조 설계로 인해 승계 국면마다 불투명한 의사결정과 지분거래 논란이 반복돼왔다. 글로벌 자본시장은 경영권 승계를 기업가치에 중대한 변수로 보기에 객관적이고 예측 가능한 로드맵을 사전에 공개하고 이해관계자와 소통하는 것을 필수 요건으로 본다.
해외투자자들은 특히 한국의 승계 과정에 정부, 금융기관, 연기금 등 공적자금 운용기관이 비시장적 논리로 개입할 가능성을 구조적 리스크로 지적한다. 정치·관료적 고려가 개입하면 경영 독립성과 자본 배분 효율성이 훼손되고, 이는 소액주주 이익 침해와 자본 유출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04 자원 재분배의 원칙화
네 번째 과제는 기업가치 제고 계획에 입각한 의사결정과 자원 재분배다. 기관투자자들은 단기 실적을 위해 자원을 소모하는 방식을 지양하고, 장기 성장전략과 자본효율성에 기반해 투자·배당·인력·연구개발 예산을 재편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과정에서 주주총수익률(TSR), 자기자본이익률(ROE) 같은 경영지표를 명확히 제시하고, 경영진 보상과 연계해 책임경영을 유도해야 한다는 요구도 강하다. 최근 정부가 추진 중인 ‘밸류업 계획’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국내 상장기업은 자사주 매입·소각, 배당 확대 등 주주환원 강화와 함께 TSR을 경영 성과 지표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TSR은 주가변동률과 배당수익률을 합산한 지표로, 단기 실적보다 장기 주주가치를 중시한다. 정부가 올해 초 ‘주주가치 제고 계획(밸류업 계획)’을 발표하며 자본효율성 제고 방안을 요구한 이후 기업들은 TSR 기반 경영을 강화하고 있다.
기관투자자들도 단기 실적보다 장기 주주가치 제고 노력에 가중치를 두는 분위기다. 이남우 인하대 교수는 “보통주는 배당 요구권뿐 아니라 이사 선임, M&A 투표, 회사 운영 제안권까지 포함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런 권리의 가치가 거의 반영되지 않는다”며 “지배구조가 개선되면 주가 수준이 높아지고 배당 여력이 커지며 TSR도 개선된다”고 강조했다. 시장에서는 TSR이 밸류업 정책의 성패를 가를 핵심 지표로 부상하고 있다.

05 ESG 등 기반 혁신 성장
마지막으로, 해외투자자들은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통한 리스크 관리와 혁신 성장 동력 확보를 중시한다. 이사회가 기후 위기 대응, 인적자본 투자, 공급망 관리 등 지속가능경영 과제를 단순한 규제 대응이 아닌 미래 성장 전략의 한 축으로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G20/OECD 기업지배구조 원칙이 2023년 9월 개정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다. 개정된 원칙은 기업의 ESG 경영과 관련한 이사회의 책임 강화, 기업 집단에 대한 감독 강화, 기관투자자의 스튜어드십 코드에 기반한 경영 참여 촉진 등을 요구한다.
기업 이사회가 장기적 기술혁신과 사업 전환에 성공할 수 있다는 설득력 있는 성장 스토리를 제시해야 투자자들이 확신을 갖고 자본을 집행할 수 있다는 의미다. 지배구조 개선과 주주환원은 파이를 나누는 방식일 뿐, 파이를 키우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재원 서울대 교수는 최근 한국경제신문을 통해 “코스피지수가 5년 내 5000을 달성하지 않아도 좋다. 중요한 것은 꾸준한 수익률을 내는 시장을 만드는 것”이라며 혁신 성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미국 증시는 지난 100년간 연평균 10% 안팎의 상승세를 이어왔는데, 배당보다 혁신 투자와 성장 스토리가 원동력이었다. 반면, 한국은 주력 기업이 가치주 위주에 머물고 미래 신산업을 선도하는 성장주가 드물다는 점이 약점으로 꼽힌다는 것이 최 교수의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한국 증시 재평가를 위해서는 ‘지배구조 개선’과 ‘혁신 성장’이라는 두 축이 동시에 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도 “ESG 경영을 토대로 장기 성과를 내야 코스피5000 시대도 가능하다”며 “AI·에너지 분야에서 새로운 국가 대표 산업의 등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해외투자자들은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꼬리표를 떼기 위해 한국 기업이 과거와 결별하고 얼마나 빠르게 변모할 수 있을지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
이승균 한경ESG 기자 cs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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