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자인 지구를 따라서, 도시 탐방
축제 초창기 일부 지역에 국한되었던 디자인 지구가 이제는 도시 전역으로 확장되었으며, 각기 다른 정체성을 토대로 이들은 도시의 활력을 되살리고 창의적인 생태계를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2006년 처음 시작된 브롬톤 디자인 지구는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을 비롯한 글로벌 브랜드와 문화 기관이 어우러져 관광객에게도 사랑받는 매력적인 동네다. 파크 로열은 활기찬 산업 지역으로, 중공업과 창조 산업 간의 지속적인 교류가 이루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곳의 창작자들은 로컬 제조업체에서 조달한 재활용 소재와 산업 폐기물 등 간과되었던 자원을 활용하며 순환 경제의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 가구 제작, 도예, 유리 및 가죽 공예 등 250개가 넘는 스튜디오가 위치한 덕에 다분야 간의 협업도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첼시는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메리 퀀트가 남긴 패션 유산을 기반으로, 부티크부터 식음 공간까지 생기 넘치는 분위기를 자랑한다. 여기에서 더콘란샵은 신규 가구 컬렉션을 출시했으며, 영국의 대표 인테리어 브랜드 그레이엄 앤 브라운은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했다. 자하 하디드 디자인과 로카 런던 갤러리, 디자이너스 길드와 이탈리아의 혁신적인 가구 브랜드 모로소의 공동 프로젝트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메이페어는 예술, 디자인, 패션, 호스피탈리티를 융합하며, 선도적이고 유망한 인재들을 하나로 모았고, 패링던과 바비칸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이씨원(EC1)은 건축 스튜디오가 밀집해 있어 현지 건축가들을 만나보기 좋았다. 올해 처음 등장한 플리트 스트리트 쿼터(Fleet St Quarter)는 오랫동안 언론과 인쇄의 중심지였으며, 이에 종이의 세계를 탐구하는 콘퍼런스 ‘페이퍼캠프 포(Papercamp 4)’와 윤리적 디자인과 지적재산권의 중요성에 대한 열띤 토론이 열렸다. 동 런던의 다양성을 보여준 윌리엄 모리스 디자인 라인은 주말 동안 인파를 불러 모았다. 쇼디치에서는 디자인 중심적인 업무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설루션을 탐색한 《디자인 앳 워크Design at Work》와 문화가 디자인에 미치는 영향을 살핀 《디자인 컬처Design Culture》 같은 전시가 주목받았다. 특히, 네 번째 무대를 가진 《머티리얼 매터스Material Matters》에서는 미국의 생명공학 기업 마이코웍스(MycoWorks)의 영지버섯 균사체 기반 소재인 레이시™(Reishi™)로 만든 노르딕 라이트 컬렉션은 물론이고, 전통 공예와 최첨단 제조 기술 기반의 재료들을 통해 미래지향적 혁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축제의 정수인 랜드마크 프로젝트도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런던을 기반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조명 디자이너 리 브룸(Lee Broom)은 사우스뱅크 센터 내 로열 페스티벌 홀 입구에 기념비적인 조각 조명 ‘비콘Beacon’을 공개했다. 작품은 이 지역의 상징적인 브루탈리즘 건축과 한때 ‘변화의 등대’로 칭송받았던 1951년 영국 축제(Festival of Britain)의 유산에서 영감을 받았다. 해가 진 뒤 더욱 빛을 발하는 대형 조명은 템스강 건너편 우뚝 솟은 빅벤과 조화를 이루며 도시에 생동감을 더하며, 축제 이후 윈터 라이트 페스티벌에서도 존재감을 이어갈 예정이다. 해체 후에는 구성 요소를 개별 조명 기구로 다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와 더불어 내셔널 갤러리 맞은편, 트래펄가 광장의 상징인 넬슨 기념 기둥 바로 앞에는 폴 콕세지(Paul Cocksedge)와 구글 아트 앤 컬처가 함께 만든 공공 설치물 ‘넬슨이 보는 것(What Nelson Sees)’이 자리했다. 거대한 교차 튜브 속 렌즈를 통해 대중에게는 공개된 적 없던 런던의 옛 모습을 파노라믹하게 보여주었다. 관람객들은 넬슨의 시각을 빌려 마차가 자동차로, 가스등이 가로등으로 바뀌는 등 지난 세기 동안 발전해 온 수도의 변화상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었다.


축제의 중심지에서 만난 시대 디자인
브롬톤 지구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은 페스티벌 허브로, 단순한 미학을 넘어 지속 가능성과 기후 위기를 포함한 중대한 사회 환경적 현안을 다루는 출품작들을 적극적으로 조명하며 포용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박물관의 현대 미술팀 수석 큐레이터인 크리스티안 볼싱(Kristian Volsing)은 현장에서 “천연자원의 채굴과 문화유산의 손실, 세계적 갈등, 그리고 AI의 급부상과 같은 현대인이 직면한 이슈들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시대적 과제를 저마다의 관점으로 바라보고자 창작자들을 초대했고, 그들은 인간의 대응에 대한 성찰을 촉구합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개인의 작은 변화에서 공동체로서 서로를 지지하고 연대를 구축해 함께 고민하고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덧붙였다.
고풍스러운 실내에서 만난 루 디소(Roo Dhissou)는 신진 디자이너 커미션 수상자다. 그녀는 고속철도 건설 부지에서 발굴한 흙을 전통 방식으로 활용해 파빌리온 ‘힐, 홈, 흠(Heal, Home, Hmmm)’을 완성했다. 이는 사람이 지은 건축물이 접근성, 배려, 환경적 책임을 어떻게 담아내는지에 대한 고찰이었다.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단독 전시로 유럽에 데뷔한 오카자키 류노스케(Ryunosuke Okazaki)는 원폭의 상흔을 지닌 히로시마 출신으로, 평화에 대한 염원을 담은 미래적인 의상 ‘조몬조몬(JOMONJOMON)’ 시리즈를 공개했다.

람지 말라트(Ramzi Mallat)의 ‘당신의 순교자는 아닙니다(Not Your Martyr)’는 지난 베이루트 항구 폭발 사고의 희생자를 추모했다. 레바논의 전통 쇼트브레드 페이스트리인 마아물(ma’amoul)을 생동감 넘치는 유리 소재로 형상화한 이 오색찬란한 작품은 반(反)기념물(Counter-monument)로서 집단적 트라우마에 대한 조용한 헌사였다. 이와 나란히 놓인 ‘기록과 안경의 파편(Debris of Text and Eyeglasses)’은 레바논 예술가 라나 하다드(Rana Haddad)와 파스칼 하켐(Pascal Hachem)이 2000년 사고 현장에서 수습한 부서진 안경들을 전시하며, 당시의 참혹성을 되새겼다. 평소에도 차 한잔 즐기기에 좋은 고즈넉한 안뜰로 자리를 옮기면, 건물의 붉은 벽돌과 대비되는 2천 개의 푸른 세라믹 의자가 방문객들을 맞이했다. 이는 알리샤 파타노프스카(Alicja Patanowska)의 ‘물결 효과(The Ripple Effect)’라는 작품으로, 폴란드 광산 폐기물을 재료로 사용하고 분수를 내장해, 물과 물질의 순환을 이야기했다.


한편, ‘런던의 창의성을 전 세계에 알리고, 최고의 인재들을 모으는 연례 행사’를 목표로, 존 소렐 경(John Sorrell) CBE과 공동으로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을 설립한 벤 에번스 경(Ben Evans) CBE을 트래펄가 광장에서 만났다. 그는 2019년 창조 산업에 기여한 공로로 대영 제국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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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이것이 디자인 생태계에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행사의 시작은 분산된 디자인 커뮤니티를 한데 모으려는 필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당시 런던의 디자인 분야는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할 뿐 서로 간의 소통과 교류는 거의 전무했지요. 창의적 활동이 넘쳐나는 도시의 특성상 오히려 업계의 실질적인 목소리가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 디자인 행사를 개최하는 도시는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현재는 200곳이 넘습니다. 이렇듯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의 성공은 전 세계인들에 영감을 주었다고 봅니다. 아울러 눈에 띄는 변화는 디자인에 대한 대중적 인식의 확장입니다. 축제를 진행하며 일반인들의 관심 역시 전문가 못지않게 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축제를 통해 대중은 디자인에 대한 지식을 넓혔고, 일상에서 디자인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데 자신감을 얻게 되었죠. 이는 디자인이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의 삶에 스며든 필수적인 요소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
▷ 페스티벌이라는 명칭에서 이미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행사의 민주적인 면모가 느껴지네요. 다른 표현을 고민해 보지는 않으셨나요?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을 선택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행사가 일주일 이상 지속되기에 ‘위크’보다는 ‘페스티벌’이 더 적합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궁극적인 목표는 디자인을 축하하는 자리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에 비해 디자인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크게 달라졌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세대를 거쳐 서서히 진행되다가 인터넷의 발달로 급격히 가속화되었죠. 일상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디자인을 접하지만, 그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이에 우리는 새롭고, 혁신적이며, 뛰어난 디자인을 지지하고 함께 기념하며, 이를 널리 알리는 스토리텔러의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여타 도시들과 차별화되는 런던만의 독특한 풍경은 무엇인가요?
"크게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국제성과 개방성입니다. 전 세계의 탤런트들이 끊임없이 유입되며 다양한 영향을 흡수하는 덕분에 ‘영국 디자인’이라는 단일의 정체성을 정의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저는 평생 이 도시에서 살아왔지만, 당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국적이나 종교가 아닌, 독창성과 아이디어 자체에 관심을 갖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열린 태도가 다채로운 디자인 활동을 가능하게 합니다. 두 번째는 수평적 우수성입니다. 한두 가지 특정 분야에만 강점을 보이는 여타 도시들과 달리, 런던은 제품 디자인, 건축, 패션 등 20여 개의 창의 분야가 국제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며 전반적인 크리에이티브 역량을 높입니다. 이는 도시의 소중한 자산이 되며, 국내외 정치 경제 상황의 변동에도 흔들리지 않는 원동력이 됩니다."
▷ 탄탄한 적응력에도 불구하고, 현시점에서 브렉시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브렉시트가 런던의 디자인 신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보시나요?
"디자인에는 국경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아이디어만 있다면 말이죠. 오히려 여러 아이디어를 수용할수록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브렉시트 이후 가장 큰 현상은 유럽에서 재능 있는 인력의 유입이 둔화된 것입니다. 창조 산업의 번영은 최고의 인력에 달려 있는데, 문이 닫히면 그 동력은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느리게 움직이지만, 이미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런던은 도시 전체 일자리의 5분의 1이 창조 부문에 속할 만큼 그 규모가 상당합니다. 디자이너는 문제 해결사입니다. 기술이 그 자체로는 잠재력을 온전히 발휘하기 어려운 것처럼, 사람과 사회를 연결하는 디자인은 모든 사회의 핵심이죠. 따라서 우리는 정부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기를 바랍니다. 다행히 그들은 창조 산업을 우선순위에 두고 각종 지원을 펼치고 있으나, 디자인 분야에도 과학 분야 최고 인재에게 주어지는 특별 비자와 같은 추가 지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 앞서 창조 산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언급하셨는데요, 랜드마크 프로젝트를 비롯한 대규모 행사에 대한 런던시의 지원은 어떤가요?
"런던시는 장기간 축제를 지원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디자인은 경제적 측면을 넘어 도시의 명성, 삶의 질과 주거 환경 등 다양한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죠. 이곳에서는 프리즈 아트 페어, 런던 패션 위크, 런던 필름 페스티벌을 포함한 문화 행사가 연달아 개최됩니다. 이 모든 이벤트는 창조 산업 전반을 홍보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합니다. 런던시는 이를 도시의 전략적 자산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패션, 예술, 공예 등 다른 분야와 협력하여 시너지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런던=유승주 아르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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