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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망하는데 정치 싸움만"...천재들 외면한 나라의 최후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입력 2025-09-27 07:18   수정 2025-09-27 09:51


배경도 몸도 없이 허공에 떠 있는 한 남자의 얼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은 정면을 향하고, 수염은 한 올 한 올 살아있는 것처럼 위쪽으로 떠올라 있습니다. 그 근엄한 표정은 꾸짖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압도적인 작품은 공재 윤두서(1668~1715)가 그린 국보 ‘자화상’. 영화 ‘관상’의 포스터로 패러디되면서 대중에게도 익숙해진 얼굴입니다.

지금 봐도 강렬한 이 작품. 조선시대에는 그야말로 혁신적인 그림이었습니다. 자화상이라는 주제부터가 그렇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개인의 자아를 드러내길 꺼리는 풍조가 있어서, 자화상을 거의 그리지 않았거든요. 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인 조선시대 인물화는 대각선으로 앞을 바라보는 구도이지만, 이 작품은 정면을 마주 보고 있습니다. 먹의 농담(濃淡·짙음과 옅음)으로 입체감을 살려낸 기법도 선진적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파격적인 그림을 그린 윤두서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가 시대의 상식을 깨부수면서까지 자신의 내면을 이토록 집요하게 그려낸 이유는 뭘까요. 조선이 외면했던 천재 선비 화가, 윤두서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시대를 앞서간 실학자
자화상에서 보여준 눈빛처럼, 윤두서는 세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시선과 통찰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노비 제도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노비도 사람의 자식이다. 노비와 주인의 관계는 그저 경제적인 계약 관계일 뿐이다. 노비를 사람답게 대접하는 게 집안을 잘 보전하는 길이다.” “부모가 노비라고 해서 자식도 노비인 것은 너무 잔인하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이는 파격적인 주장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윤두서는 전염병인 천연두의 본질을 간파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천연두를 귀신이 일으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환자가 발생하면 사람들은 귀신을 달래기 위해 안주와 음식을 차리고 아침저녁으로 빌었습니다. ‘귀신님, 돌아가 주세요.’ 하지만 윤두서는 “그런 짓 하지 말라”는 내용의 책을 썼습니다. 귀신에게 빌기 위해 사람이 모이는 것 자체가 병을 옮긴다는 사실을 과학적 직관으로 알아챈 겁니다. 이런 원칙을 지킨 덕분에 대대로 윤씨 집안에는 천연두 피해가 적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렇게 시대를 앞서간 현실 감각은 윤두서의 배경에서 비롯됐습니다. 해남 윤씨는 명망 높은 사대부 집안이자, 해남 지역에서 거대한 토지와 자산을 운용하는 집안이었습니다. 윤두서는 젊은 시절부터 이런 가문을 경영하고 사람들을 관리하며 현실 경제에 눈을 떴습니다. 여기에 26세에 진사시(과거제도에서 1차 시험 격)에 합격할 정도의 명석함이 더해졌습니다. 덕분에 그는 이론과 현실 감각을 겸비한 지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도 윤두서는 사실을 중시했습니다. 그는 당시 조선에서 말을 가장 잘 그리는 화가로 유명했습니다. 철저한 관찰로 만들어낸 실력이었습니다. 기록은 이렇습니다. “말을 그릴 때면 마구간 앞에서 하루종일 말을 쳐다봤다. 말의 모양과 행동을 털끝 하나까지 그릴 수 있다고 확신했을 때 비로소 붓을 들었다.” 이처럼 윤두서의 천재성은 현실에 대한 집요한 관찰과 탐구에서 나왔습니다.



부유한 명문가 출신, 시대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현실 감각, 그리고 이를 구현할 천재적 재능까지. 윤두서는 분명 조선을 위해 큰일을 할 인재였습니다. 하지만 벼슬길은 끝내 열리지 않았습니다. 지독한 시대 때문이었습니다.
붕당, 극한의 정치 대립
조정의 신하들이 쓸데없는 논쟁을 벌이며 서로 이권 다툼에만 골몰하는 광경. 조선의 붕당정치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많은 사람이 떠올리는 이미지는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권력의 견제와 균형이라는 역할을 수행하던 붕당정치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현실과 관계없는 관념적인 탁상공론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는 충신이며 군자고, 저놈들은 소인이고 역적이다”라는 흑백논리로, 정치 보복과 피의 숙청으로 이어졌지요. 윤두서가 살았던 숙종 때는 이런 붕당정치와 당쟁의 폐해가 특히 극심했던 시기였습니다.


역사 시간에 서인, 남인, 노론, 소론 같은 단어를 들어본 기억이 있으실 겁니다. 지금 정치로 치면 당(黨)입니다. 윤두서 집안은 그중 남인에 속했습니다. 윤두서의 증조부인 윤선도는 남인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 광해군 때 벼슬길에 오른 그는 당쟁에 휩쓸렸고, 여러 차례 유배를 가면서 무려 20년간이나 유배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말년에는 정치에서 벗어나 쉬며 수능 등 각종 국어 시험에 단골로 출제되는 ‘어부사시사’ 같은 시를 짓기도 했지요.

윤선도의 존재감이 워낙 컸기에, 윤두서가 속한 해남 윤씨 집안의 운명은 남인의 운명을 따라갔습니다. 정치 상황이 변하면서 남인이 강해지면 해남 윤씨 집안에도 볕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남인이 탄압받으면 해남 윤씨들도 고통받았습니다. 문제는 남인의 별명이 ‘만년 야당’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집안이 불이익을 당할 때가 더 많았다는 얘깁니다.


윤두서와 그의 주변 사람들은 자주 정쟁에 휘말렸습니다. 열두 살 때인 1680년(경신환국), 윤두서는 친구의 아버지를 비롯한 남인 여럿이 목숨을 잃고 정치에서 축출되는 광경을 봤습니다. 스무 살 때인 1689년(기사환국)에 다시 남인이 권력을 잡았지만, 1694년(갑술환국) 때는 남인 세력이 박살이 나버렸습니다.

1696년에는 윤두서의 셋째 형이 상소를 올렸다가 고문 끝에 사망하는 사건까지 벌어집니다. 이듬해에는 윤두서 본인도 상관없는 역모에 휘말려 억울하게 목숨을 잃을 뻔했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지기도 했습니다.

20대의 나이로 과거시험(1차 시험 격인 진사시)의 문을 통과했던 윤두서. 한 때 큰 뜻을 품은 그였지만, 이런 현실을 보며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애써 성공하려 노력할수록 자신과 집안이 위험에 처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결국 윤두서는 무리하지 않고 정치를 피해 조용히 지내기로 합니다.
붓으로 응시하다
대신 윤두서는 새로운 사상과 학문을 배우고 널리 알려 세상에 기여하기로 했습니다. 천문학을 공부한 것도, 지도를 그린 것도 이런 노력 중 하나였습니다. 윤두서가 그린 동국여지지도는 현재 보물로 지정돼 있습니다. 자신과 뜻이 맞고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이들과 함께 일종의 ‘스터디 그룹’도 만들었습니다.



그림에도 힘썼습니다. 그는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의 미술 기법을 적극적으로 배워 수묵화에 적용했습니다. ‘채과도’는 서양 정물화의 영향을 받은 그림입니다. 서양의 명암법처럼, 수묵의 짙고 옅음을 통해 음영을 표현한 게 눈에 띕니다. 여러 수묵화나 인물화를 통해 어지러운 세상에서 숨어 지내며 기회를 기다리는 심정을 표현하기도 했지요.

그러던 윤두서가 관직에 나아갈 뜻을 완전히 버린 건 서른여덟 살인 1706년. 이 해, 윤두서의 학문적 동지였던 이잠(1660~1706)이 “지금 간신들이 나라를 주무르고 있으니 이들을 내쫓고 국정을 쇄신하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왕이 직접 주도하는 끔찍한 고문 끝에 맞아 죽습니다. 마침 윤두서는 이잠의 부탁을 받아 유교의 성인군자들 그림(십이성현화상첩)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윤두서는 생각했습니다. ‘이토록 나라를 사랑하고 유교를 열심히 공부했던 친구가 왕의 손에 죽었다. 이런 세상에서 정치를 해 무엇하겠는가.


‘자화상’은 이 무렵 그린 그림입니다. 세상에 대한 희망이 꺾이고 정치에 대한 환멸이 극에 달했던 시기. 그 절망의 한복판에서 윤두서는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합니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위쪽으로 솟구치는 듯한 수염으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 건, 이 세상 속에서 ‘나’의 위치를 찾으려는 윤두서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불합리한 정쟁에 휩쓸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자신 역시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뜻을 펼칠 수 없는 부조리한 상황. 불타는 듯한 수염 한 올 한 올을 그리며 윤두서는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차마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사실 윤두서가 ‘진짜 얼굴만 그렸는지’를 놓고는 아직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단 1930년대 찍은 사진에는 얼굴 아래에 간략하게나마 옷이 그려져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100년 전에는 몸이 있었지만, 그 후 보존 과정에서 이 부분이 훼손된 겁니다.

하지만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전 문화재위원장) 등 “솜씨가 조잡하고 화풍이 맞지 않는다”며 윤두서가 아닌 후대 사람들이 몸통 부분을 추가로 그려 넣었던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윤두서의 다른 그림과 비교했을때 옷 표현은 눈에 띄게 간략합니다.

작품을 뜯어서 분석하면 뭐가 정답인지 알 수 있겠지만, 국보를 훼손해야 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쨌거나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윤두서가 사회적인 통념을 깨고 ‘나’, ‘나의 얼굴’을 극도로 강조해 세밀하게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시대를 넘은 강렬한 시선
어느덧 윤두서의 나이도 40대 중반에 접어들었습니다. 1712년 모친상을 치른 윤두서는 해남으로 내려가 재정비의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가족과 함께 낙향한 윤두서는 가문을 경영하고 집안의 대소사를 챙겼습니다. 직접 간척 사업을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윤두서가 현실을 보는 눈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여러 풍속화들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윤두서의 풍속화 중 나물 캐는 여인은 특히 파격적인 그림이었습니다. 비록 뒷모습이지만, ‘남녀칠세부동석’이 상식이었던 당시로서는 사대부 남성이 서민 여성의 모습을 그렸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이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현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자세는 훗날 김홍도, 신윤복 등 후배 화가들이 주도하는 풍속화의 유행을 예고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윤두서의 건강은 점점 악화됩니다. 이때까지 겪었던 마음의 고통에 더해 해남 생활의 실질적인 어려움, 가문의 일을 도맡아 처리하며 쌓인 피로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남깁니다. “해남에서 사는 건 어려운 일이네. 눈이 어두워져서 편지를 쓰는 것도 쉽지 않고, 그림 그리는 건 더 어렵구먼.” 그리고 해남으로 내려간 지 3년째인 1715년, 감기를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의 나이 48세였습니다.



생전 이미 유명 화가였던 윤두서는 사후 조선 최고의 화가 중 하나로 평가받았습니다. 그가 남긴 그림들은 후배들의 본보기가 됐고, 친구들과 만나 그림과 예술에 관해 토론하며 작품을 평가했던 기록은 조선 후기 미술 애호가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스터디 그룹’의 친구들과 의논했던 사상과 학문은 실학으로 이어져 훗날 망해가는 조선에 그나마 숨구멍을 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 주인공 중 하나가 윤두서의 외증손자인 실학자, 다산 정약용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대가 외면했던 천재의 지성이 뒤늦게나마 인정받았다”고 글을 마무리하기에는, 뒷맛이 영 개운치 않습니다. 윤두서의 삶을 보며 여러 질문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이런 것들. 만약 윤두서의 재능과 혜안이 당대에 꽃을 피웠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조선의 사회 모순과 정쟁 속에서 윤두서처럼 아깝게 묻힌 재능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요.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떨까요. 위대한 재능들을 온전히 품을 수 있는 환경일까요. 재능이 아니라 출신과 신분으로 삶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아지면, 그 사회는 어떤 최후를 맞을까요. 윤두서의 강렬한 시선은 여전히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합니다.

<i>**'공재 윤두서 : 조선 후기 선비 그림의 선구자'(박은순 지음)을 중심으로 '그대의 빼어난 예술이 덕을 가리었네 : 실자 공재 윤두서 이야기'(김영주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해남 윤씨의 종가인 녹우당에서 소장 중입니다. 지금 녹우당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에서 영인본(복제본)으로나마 감상이 가능합니다. 대구간송미술관에서는 지금 윤두서의 '심산지록도'가 전시 중입니다.</i>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국내 문화 분야 구독자 1위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술 소식과 지금 열리는 전시에 대한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구독 중인 8만명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세 권의 책으로 곁에 두실 수도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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