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벽산엔지니어링은 2021년 말 몽골 에너지부와 8600만달러(약 1215억원)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 한국 정부의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을 통해 몽골 아이막의 지역난방 시설을 설계·조달·시공(EPC)하는 사업이었다.
처음엔 순탄했는데 2022년부터 삐걱대기 시작했다. 건설경기 침체로 벽산엔지니어링이 그해 적자를 내며 2023년 부채비율이 468.3%까지 치솟았고 결국 올 3월 서울회생법원에 기업회생 절차(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몽골을 비롯한 해외 사업에서도 660억원의 환차손이 발생했다. 벽산엔지니어링은 회생신청서에서 “EPC 및 해외 시공 프로젝트에서 대규모 손실이 났다”며 “신용등급 하향에 따른 자금 조달 및 금융부채 원리금 상환이 어려워졌다”고 주장해 기업회생 개시 허가를 받았다. EDCF 사업 주체인 건설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 사업이 중단된 첫 사례였다.
문제는 제2의 벽산엔지니어링이 계속 나올 수 있다는 점이다. EDCF 사업을 수주한 건설사 중 재무 상태가 나쁜 곳이 적지 않다. 부채비율이 500% 이상인 금호건설이 대표적이다. 금호건설은 2008년 캄보디아 댐 사업을 따내는 등 현재까지 15개 EDCF 프로젝트를 수행 중이다. 이 가운데 지난해 시작한 1157억원 규모의 캄보디아 타크마우 하수처리시설 프로젝트에서 환차손이 커지고 있다. 지난해 이 회사의 부채비율은 전년보다 2배 이상으로 높아진 588%에 달했다. 이에 대해 금호건설 관계자는 "지난해 부채율이 늘어난 것은 국내 사업 손실 때문이고 올 들어서 실적이 개선되고 있다"고 밝혔다.올 5월 라오스 국립의과대학병원 건립 EDCF 사업자로 선정된 일성건설의 재무 사정도 나빠지고 있다. 지난해 이 회사의 부채비율은 454.4%로 전년(227.3%)의 두 배 수준으로 급등했다. 일성건설은 지난해 몽골 바양골린암 공공주택단지와 베트남 케넷철도 개량사업을 수주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일성건설 관계자는 "지난해 부채비율이 오른 건 EDCF가 아닌 국내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때문이었고 이를 대손충당금(약 580억원)으로 반영한 결과"라며 "올 들어서는 실적이 개선되고 있고 해외 EDCF 사업에도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지난 6월 라오스에서 현대식 병원 건립 사업자로 나선 보미건설도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 이 회사는 지난해 매출 1420억원과 영업손실 292억원을 냈다. 부채비율은 129.2%로 2021년(53%) 대비 두 배 이상으로 급등했다. 이자보상배율은 0.43배로 떨어져 영업이익으로 이자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주로 동남아시아에서 EDCF 사업을 해온 도화엔지니어링의 경영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이 회사는 유신 등과 함께 한국-캄보디아 간 우정의 다리 건설과 베트남 철도 개량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지난해 적자전환했다.
EDCF에 참여한 한 중견기업 관계자는 “경영 여건이 악화해 해외 사업에서 환차손과 물류비용이 증가하고 있지만 ‘일단 매출을 늘리고 보자’며 EDCF에 뛰어드는 곳이 많다”며 “벽산엔지니어링은 시작일 뿐 시공능력 하위권 건설사를 중심으로 비슷한 사례가 나올 것이란 얘기가 업계에 파다하다”고 전했다.
장한기술은 자체적으로 해결하려고 했지만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있다. 유원대 장한기술 대표는 “수출입은행이 벽산엔지니어링에 지급한 사업자금이 우리 부품 구입 대금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직접 자금을 보내달라고 했더니 EDCF 규정상 직접 계약자에게만 줄 수 있다고 했다”며 “EDCF에는 직접 계약자 외 다른 납품업체를 위한 안전장치가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벽산의 신용도가 나빠 계약이행보증보험을 들 수 없었던 데다 우리가 납품하는 대상이 한국 회사라 수출로 인정되지 않아 수출보험도 가입할 수 없었다”며 “하도급업체에 이행보증금을 못 주는 회사를 EDCF 사업자로 선정한 것부터가 잘못 아니냐”고 꼬집었다.
재입찰을 해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건 아니다. 사업이 지체되는 데다 이전 사업자와 맺은 계약을 새 사업자가 승계할 의무가 없어 장한기술이 피해를 구제받기는 쉽지 않다. 현지에 열교환 설비를 맞춤 제작해 납품한 장한기술로서는 재입찰 사업자와 재협상해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장한기술이 못 받은 제품 판매 원가는 108억원이지만 몽골 창고 보관비와 물류비, 이자, 인건비 등을 고려하면 피해액은 125억원으로 늘어난다. 이 회사의 지난해 매출(200억원)의 절반이 넘는 금액이다.
수은이 재입찰 때 ‘이전 사업자의 계약을 승계하는 조건’을 붙인다면 장한기술이 손실을 일부라도 보상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건설사들이 입찰 자체를 기피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게다가 태산보일러, 두웨이 등 다른 중국 기업들도 컨소시엄의 채권자로 들어와 있어 해결책을 찾는 데 난항이 예상된다.
수은 관계자는 “하도급업체의 미지급 채무를 인수하는 조건으로 입찰을 진행할지는 발주처인 몽골 정부가 최종 결정할 사안”이라며 “현장 실태조사에 대한 용역 결과를 받은 뒤 기존 하도급사를 활용하는 방안 등을 몽골 정부와 협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韓은 피해보전 법적 규정 없어…"중단되면 사업자 교체해 진행"
2010년 OECD DAC에 가입한 한국도 몇 차례 지적받았다. ‘상업적 성격이 강하다’거나 ‘무상원조와 유상원조의 균형이 부족하다’ 또는 ‘수원국(개발도상국)의 개발 전략과 연계가 약하다’ 등의 평가를 받았다. 그렇다고 한국 정부가 EDCF에 따른 피해를 보전해야 할 법적 의무는 없다. 환차손이나 기업 파산, 회생 같은 리스크가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이를 메워줘야 한다는 규정 자체가 EDCF에 없기 때문이다.
기획재정부는 “중단된 EDCF 사업은 다른 건설사로 대체해 진행하면 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거래대금을 못 받은 중소기업은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다.
한국과 달리 일부 선진국은 ODA 사업에 참여한 기업을 위해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미국 국제개발처(USAID)는 참여 중소기업에 대출 원금의 최대 50%를 보증해준다. 원조사업에 참여한 기업이 건설사 파산이나 지급 불이행 같은 리스크 발생 시 피해액의 50%는 건질 수 있다. 영국은 기업금융보증제도(EFG)를 통해 중소기업에 은행 대출의 최대 75%를 보증해준다. 유럽연합은 유럽투자은행(EIB)이나 유럽투자펀드(EIF)를 이용해 중소기업 자금을 최대 1250만유로(약 203억원)까지 지원해준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해외사업은 예측할 수 없는 요소가 많아 혁신 제품과 기술을 보유한 중소기업이 안전장치 없이 국가 사업에 참여하는 건 문제가 있다”며 “국가 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일정 비율 지급보증하는 형태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민지혜 기자 spo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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