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사 재판을 검사와 변호사의 레이스라고 본다면, 그는 그중에서도 가장 잘 달리는 경주마였다. 연극 '프리마 파시' 주인공 테사는 평범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영국에서 가장 수준 높다는 명문대 케임브리지 법대에 진학했고, 3명 중 1명은 이탈한다는 대학 과정을 거쳐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법정 변호사까지 젊은 나이에 탄탄대로를 걸었다. 혈통은 좋지 않지만, 능력 있는 경주마였던 셈이다.
테사의 어머니는 그가 레이스에서 1등을 한 날이면 "네 덕분에 범죄자 1명이 또 거리를 자유롭게 활보하게 됐다"고 했지만, 그는 알았다. 어머니가, 그의 가족들이 얼마나 그를 사랑하는지.
넘치는 자존감, 자신감 있는 말투, 재판에서 증인 신문을 할 때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즐기며 "이제 증인은 내 거고, 나만의 시간이야"라고 말하는 젊은 변호사 테사는 '법정 최고의 승부사'라 불리며 이른 나이에 왕실 변호사 자리까지 제안받을 정도로 촉망받는 인물이다. 그에게 재판은 사건을 심리하고, 교차 검증하고, 방어하는 일종의 '게임'이다. 그에게 중요한 건 '승리' 였고, 성폭행 혐의 의뢰인을 변호할 때조차 "모든 사람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적용받아야 한다"면서 피해자들을 상대로 집요한 반대 심문을 펼친다. 그리고 그게 법률 시스템 안에서 변호사로서 해야 할 일이라 믿는다.
하지만 왕실 변호사 가문의 동료 변호사 줄리언과 '썸'을 타다가 성폭행당한 후, 테사의 인생과 신념은 송두리째 변화한다. 이미 한차례 잠자리를 했고, 데이트를 하고, 그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왔다. 하지만 자기 의사에 반하는 줄리언의 행동으로 테사는 충격을 받고,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프리마 파시'의 이야기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프리마 파시'는 1인극이다. 김신록, 이자람, 차지연 각각의 배우가 홀로 무대에 올라 자신의 시점에서 여러 목소리를 번갈아 표현하며 관객들의 몰입을 끌어낸다. 테사의 독백으로 이뤄지는 고통과 분노, 체념이 뒤섞인 고군분투가 오롯이 전달된다. 특히 성범죄 가해자를 변호했던 변호사가 성폭행 피해자가 돼 느껴야 했던 사회적 시선, 제도적 장벽은 극의 갈등을 고조시킨다.
진술은 항상 불완전한 증거로 취급돼 일관성과 신뢰성을 의심받는다. 변호사와 배심원들은 피해자가 입은 피해보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판결 이후 가해자가 입을 피해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유능한 변호사였던 테사는 이 모든 상황을 예측했다. 그의 법적 감각은 '지는 싸움'이라고 했지만, 피해를 증언하는 게 또 다른 고통의 시작임을 알았지만, 테사는 그런데도 행동한다. 그리고 782일동안 고독한 싸움을 이어간다.
테사의 독백과 절규는 처절하다. 그렇지만 '프리마 파시'를 본 한 성범죄 피해자 전문 변호사는 "그래도 이 사건은 기소는 됐다"면서 "우리나라였다면 가해 남성과 피해 여성이 이전에 성관계가 있었고, '썸'이 있었다는 점에서 경찰 수사에서 무혐의로 불송치되고, 오히려 피해자가 무고 혐의로 기소됐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극의 배경이 된 영국 법원에서 성범죄 사건 유죄율은 60% 정도였다. 그렇지만 유엔이 인용한 통계에서 영국 내 강간 피해자 10명 중 1명만이 경찰에 신고하고, 신고 사건의 1.3%만 실제 유죄 판결로 이뤄진다고 했다. 한국은 이보다 신고 비율이 더 낮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테사는 말한다. 여성 3명 중 1명은 성범죄 피해를 본 경험이 있다고. 그러면서 "내가 경험하기 전엔 몰랐다"면서 자신이 그동안 신뢰하고 지켜왔던 법과 시스템의 변화를 소망한다.
이는 극작가 수지 밀러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수지 밀러 역시 호주 인권 변호사 출신으로 법률가로서 수년간 성폭력, 젠더 불평등을 겪으며 "법은 반드시 정의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프리마 파시'를 집필한 이유다.
테사는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했다. 법이 정의가 될 수 없는 지점도 그렇지만, '프리마 파시'도 그렇다. 오는 11월 2일까지 서울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상연.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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