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불(61)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한국 출신 현대미술가다. 1997년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 전시를 시작으로 세계적 미술관에서 연달아 전시를 열며 최고의 현대미술 작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정면 외벽에 조각상을 장식한 이도 그였다.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의 압도적 위상을 지닌 작가”(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라는 게 국내외 평가다.
하지만 이불의 대중적 인지도는 높지 않다. 국내 전시가 많지 않았던 데다 작품을 이해하기도 어려워서다. 친절한 작품 설명도 없다. 오히려 자신의 작품을 한마디로 정의하려는 사람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잘라 말한다.
이불은 왜 그러는 걸까. 이런 ‘불친절’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그를 세계적 작가로 떠받드는 걸까. 그렇다면 이불의 작품은 어떻게 봐야 하나. 한국경제신문 아르떼가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불: 1998년 이후’ 전시장에서 이불을 만났다.

그렇다면 이불의 작품은 이런 특이한 삶의 경험을 표현한 것일까. “그렇게 설명할 수 없다”고 이불은 답했다.
“작품에는 물론 제 삶이 반영돼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런 경험을 표현했어’라고 단정 지을 순 없습니다. 그 밖에도 여러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으니까요.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를 예로 들어 볼까요. 작품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라고 하면 ‘한 시대를 산 어떤 여인과 가족 이야기’가 되겠죠. 하지만 그러면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이 됩니다. 이해하려면 전부 읽는 수밖에 없습니다. 작품을 보는 것도 그렇습니다.” 언어로는 도저히 작품의 의미를 온전히 전달할 수 없고, 무조건 직접 보고 느껴야 한다는 뜻이다.

인터뷰에 동석한 곽준영 리움미술관 전시기획실장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게 이불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우리는 ‘A는 B다’라고 단언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익숙하다. 이런 방식은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이렇게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불은 이런 모순적인 것들을 작품으로 만든다. 한때 사람들이 꿈꿨지만 지금은 폐허로 남은 이상향의 흔적을 다룬 ‘몽그랑레시’ 연작이 대표적이다.
명확하고 절대적인 언어, 남들이 말하는 정론을 불신하는 태도는 그의 예술 세계를 관통한다. 1980년대 홍익대 미대 조소과에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술을 추상과 구상 둘로 딱 잘라 나누는 교육 방식, 민중미술과 추상미술이라는 당시 미술계의 양대 조류가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그는 연극과 퍼포먼스에 관심을 뒀다.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우면서도 보는 이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이끌어내는 예술 장르다.


예술가적 발상과 현실적 고려가 어우러진 덕분에 이불의 작품에는 수없이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이번 전시에 나온 ‘사이보그 W6’(2001)은 고대 그리스·로마 조각상과 일본 애니메이션, 기계적 형상 등을 결합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완벽한 외모와 신체라는 개념은 허상이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몸을 개조하며 그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한다는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일본 대중문화가 인조인간을 미소녀 모양으로 만든 것처럼, 기술 발전은 사회의 권력 구조와 욕망에 의해 이용된다는 주장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게다가 이 작품은 24년 전 작업했음에도 여전히 미래적으로 느껴진다. 앞서가는 미감(美感)에 수없이 많은 뜻을 담는 내공. 그가 세계적 작가로 평가받는 이유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보고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이불은 “작품은 완성된 시점에 내 손을 떠난 것이고, 각자가 감상하고 받아들이면 된다”며 “다만 미술관에서 제공하는 설명은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직접 보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불 인터뷰 전문과 기획기사, 화보는 ‘아르떼’ 매거진 17호(10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수영/강은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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