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향미 및 향료(Flavor&Fragrance·F&F) 산업에서 '빅4'의 시장 장악력이 커지고 있다. 전 세계 식탁과 화장대에 오르는 거의 모든 가공식품, 음료, 향수, 생활용품 등의 맛과 향은 사실상 4개의 거대 기업이 통제하고 있다. 최근 유럽연합(EU) 등 세계 곳곳에서 경쟁 당국이 강도 높은 조사를 하면서 이들 기업의 사업 방식이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런 과점 구조는 수십 년간 이어진 공격적인 인수합병(M&A)의 결과다. 2000년대 이후 '빅4'는 끊임없이 중소형 경쟁사나 특정 기술을 보유한 기업들을 흡수하며 몸집을 불려왔다. 2021년 IFF가 듀폰의 영양&바이오 과학 사업부와 합병하며 규모를 키운 것이 대표적이다. 지난 5월 IFF는 사업 효율화를 위해 파마 솔루션 사업부를 로케트에 매각하며 포트폴리오를 재편하기도 했다.
2023년에는 네덜란드의 영양 과학 기업 DSM과 스위스의 전통적인 향료 강자 피르메니히가 합병했다. 이 빅딜로 약 250억 유로 규모의 재료공학 거대 기업을 탄생했다. 건강, 영양 분야에 강점을 가진 DSM과 향, 맛 분야의 강자 피르메니히가 결합했다는 평가다.
글로벌 식품 컨설팅 업체 '이노베이트 푸드 인사이트'의 식품 산업 전문 컨설턴트 사라 젠킨스는 "DSM과 피르메니히의 결합은 F&F 산업의 미래를 보여준다"며 "이들은 단순한 '향료 회사'가 아니라 '과학 기반의 감각 및 웰니스 솔루션 기업'으로 진화했다"고 평가했다.
DSM-피르메니히는 합병 이후인 지난해 조정 에비타(EBITDA) 기준 1억 500만 유로의 이익 개선을 달성했다. 회사는 올해는 추가로 1억 유로의 개선을 기대하고 있다.

'빅4'가 구축한 과점 체제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된 구조적인 진입 장벽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선 대규모 R&D 투자로 IP(지식재산권)을 축적했다. 매년 매출의 상당 부분을 R&D에 투자하며 수천 개의 활성 특허를 늘리고 있다. 수십만 개에 달하는 향미 조합 데이터베이스와 숙련된 조향사 풀은 후발 주자가 따라잡을 수 없는 핵심 자산이다.
관련 규제도 이들의 사업 비결이다. F&F 산업은 각국 정부와 국제기구(IFRA, 국제향료협회 등)의 엄격한 규제를 받는다. 수천 개에 달하는 원료의 안전성, 알레르기 유발 가능성, 라벨링 규정 등을 준수하려면 방대한 법률 및 과학 전문 지식과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 이는 신규 기업에는 거대한 장벽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IFRA(국제향료협회)는 원료 ‘개별’ 성분과 제품군별로 최대 사용농도를 정한다. 메틸유제놀이나 오크모스 추출물처럼 특정 성분은 제품 카테고리별 상세 상한이 존재한다. 이런 성분별 규제는 복잡해 이를 관리하는 시스템 구축에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다.
글로벌 공급망 및 원료 소싱 능력도 요인이다. 하나의 향료 제품에는 수백 가지의 원료가 들어갈 수 있다. '빅4'는 전 세계 각지에서 수천 종의 천연 및 합성 원료를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는 복잡하고 탄력적인 공급망을 구축했다. 특정 지역의 작황 부진이나 정치적 불안정에도 대체 공급원을 통해 공급을 유지하는 능력은 신생 기업이 단기간에 모방할 수 없는 핵심 경쟁력으로 꼽힌다.

런던 경제대학의 마이클 해리슨 교수는 "F&F 산업의 과점 구조는 교과서적인 사례"라며 "높은 R&D 비용, 복잡한 규제, 글로벌 소싱 능력이라는 3중의 진입 장벽이 이들의 '성채'를 지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신 '빅4'가 실제 소유하는 것은 최종 레시피의 '구성 요소'다. 예를 들어 새로운 딸기 맛 요구르트 제품을 개발할 때, 식품 회사는 지보단에 '천연 과즙 느낌이 나면서도 상큼함이 오래 지속되는 딸기향'을 의뢰한다. 지보단은 수백 가지 화합물을 조합해 해당 요구에 맞는 독자적인 '딸기향 포뮬러'를 개발한다. 해당 포뮬러의 소유권은 지보단이 갖는다. 식품 회사는 이 포뮬러를 사용할 권리, 즉 라이선스를 획득한다. 이는 제품의 핵심 부품을 설계하고 특허를 낸 뒤 완성차 업체에 납품하는 자동차 부품사와 비슷한 구조다.
짐라이즈는 올 상반기에는 21.7%의 EBITDA 마진을 달성해 수익성이 개선됐다.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선 원가 상승의 상당 부분을 자체 흡수하며 마진이 하락하는 경우가 상당수다. 하지만 F&F 시장에서는 공급자가 비용 부담을 고객사인 식품 및 소비재 기업자들에게 전가한 것이다.
다만 이들의 가격 인상은 소비자가 체감하는 식품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글로벌 식품 가격 변동은 주로 곡물, 유지류 등 주요 원재료 가격이 주도된다. 향·향미 원료는 제품의 풍미와 품질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다 하지만 최종 제품의 총원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다. 예를 들어 청량음료 한 캔에 들어가는 향료의 원가 비중은 매우 낮다. 음료 향료 사용률은 0.03~0.08% 수준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수십 년간 수면 아래에 있던 글로벌 F&F 산업의 과점 구조는 2023년 세상에 드러났다. 전 세계 규제 당국의 동시다발적인 조사를 받으며 공적 시험대에 올랐다. 2023년 3월에 EU 집행위원회, 스위스 경쟁위원회, 영국 경쟁시장청, 미국 법무부 등 주요국의 경쟁 당국이 동시다발적인 '빅4' 사무실을 조사했다. 조사 범위는 주로 화장품, 향수, 생활용품에 사용되는 '향료' 부문에 집중됐다.
주요 혐의는 이들 기업이 가격 정책을 서로 조율하고, 특정 고객에게는 경쟁사가 제품을 공급하지 못하도록 하며, 경쟁사 간 민감한 정보를 교환하는 등의 방식으로 공정 경쟁을 저해했다는 의혹이다. 이후 영국 경쟁시장청는 조사 범위를 확대했다. 이들 기업 간 특정 인력을 서로 채용하지 않기로 하는 '담합성 채용 제한 합의'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올해 2월 미국 뉴저지 연방법원은 '빅4'를 상대로 제기된 가격 담합 관련 집단소송의 각하 요청을 기각하고 본안 심리를 결정했다. 유럽에서는 EU 일반법원이 지난 4월 짐라이즈가 제기한 EU 집행위의 현장 조사가 위법이라는 주장을 기각하며 집행위 조사의 정당성을 공식 인정하기도 했다.
이런 조사 압박에도 '빅4'는 견조한 실적을 이어갔다. 업계 1위 지보단은 올 상반기 매출 38억 6400만 스위스프랑을 기록했다. DMS-피르메니히 역시 상반기 주당핵심이익(EPS)이 42% 급증하며 합병 시너지 효과를 입증했다.
K-푸드의 세계화는 단순히 한국의 맛을 그대로 수출하는 것을 넘어선다. 현지 입맛에 맞게 변주하는 '글로컬라이제이션'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유럽 시장을 겨냥한 맞춤형 소스나 중동 시장을 위한 할랄 인증 향료가 적용된 제품을 개발하려면 '빅4'가 보유한 글로벌 소비자 데이터와 현지화 기술력이 필수다. K-뷰티 산업도 비슷하다. 독창적인 향을 구현하기 위한 핵심 향료 원료는 글로벌 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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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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