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년 두산그룹의 역사는 ‘빅딜’과 함께했다. 오비맥주 매각과 두산밥캣 인수 등 자본시장 역사에 남을 인수합병(M&A)으로 유통에서 중공업 그룹으로 변신한 두산그룹은 이번에도 5조원에 육박하는 초대형 M&A를 통한 사업 재편을 꾀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코로나19 시기 유동성 경색으로 존폐 위기에 몰렸던 두산그룹은 주력 사업인 원전(두산에너빌리티)과 건설기계(두산밥캣) 사업이 반등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각각 정부 정책과 건설 경기에 따라 사업이 근본부터 흔들리면서 새 먹거리를 찾는 데 사활을 걸었다. 인공지능(AI) 열풍을 타고 성장 궤도에 오른 반도체가 낙점됐다.

두산그룹이 SK실트론 인수에 뛰어든 것은 신수종사업으로 키워온 반도체 장비·소재 사업을 그룹 핵심 먹거리로 빠르게 정착시키겠다는 목표에 따른 행보로 풀이된다. 두산은 2022년 국내 1위 반도체 후공정 테스트 기업 테스나를 4600억원에 인수한 이후 반도체 전·후방 연계 사업 관련 매물이 나올 때마다 인수 후보로 거론됐다. SK실트론이 매물로 나온 지난해 말부터 두산은 사내 CSO신사업전략팀 주도로 인수를 검토했다.
두산그룹은 지주사 ㈜두산 내 전자BG사업부와 자회사인 두산테스나를 두 축으로 삼아 반도체 사업을 꾸리고 있다. ㈜두산의 전자BG가 반도체 기판용 동박적층판(CCL)을 생산하고, 두산테스나가 비메모리 반도체 테스트를 맡는 구조다. 최근 들어 전자BG에서 생산하는 CCL이 엔비디아에서 만드는 AI 가속기 관련 반도체 패키징에 포함되면서 실적이 가파르게 개선됐다. 막 진입한 글로벌 공급망에 SK실트론에서 생산할 맞춤형 웨이퍼 등도 패키지 형태로 공급하면 시너지가 뚜렷할 것이란 전망이다.
그룹에서는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의 장남인 박상수 수석이 반도체 사업 확장을 주도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한국투자증권 반도체 애널리스트로 활동하다가 2023년 9월 두산그룹에 입사했다.
㈜두산은 올해 2분기까지 자회사 두산로보틱스 주식(5500억원)과 두산에너빌리티 주식(3600억원)을 담보로 한 대출과 일반 신용대출(900억원)을 통해 총 1조원의 현금을 확보했다. 2분기 ㈜두산의 현금성 자산과 단기금융상품은 1조2385억원에 달해 추가 배당 수익과 일부 차입으로 인수대금을 마련할 수 있다.
지주사였던 ㈜두산은 최근 지주사 지위를 포기하면서 SK실트론 인수를 위한 ‘기초 작업’도 마쳤다. 공정거래법상 지주사 규제를 벗어나면서 연결기준 부채비율을 200% 이내로 유지해야 하는 규정과 자·손자회사 지분 보유 제한에서 자유로워졌다.
SK그룹도 두산그룹을 가장 선호하는 인수 후보로 두고 협상을 벌여왔다. 추후 재매각이 불가피한 사모펀드(PEF)가 반도체 필수 소재 제조사 SK실트론의 경영권을 쥐는 것보다 두산그룹의 인수가 규제당국과 임직원을 설득하는 데 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연간 1조원에 육박하는 시설투자비(CAPEX)를 쏟아부어야 하는 웨이퍼 사업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려면 더 장기적인 투자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대기업이 새 주인으로 적합하다는 판단이 섰다. 양측의 대주주도 이런 필요성에 공감해 소통해 왔다.
문재인 정부 때는 탈원전으로 원전 수주가 끊기며 그룹 전체가 직격탄을 맞았다. 해상풍력·소형모듈원전(SMR) 등 신사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가시적인 성과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룹의 안정적인 미래 성장을 주도할 엔진으로 보기엔 한계가 뚜렷하다.
또 다른 먹거리인 미국 기반 소형건설장비 1위 기업 두산밥캣 역시 건설 경기와 인프라 투자 사이클에 따라 실적이 크게 좌우된다.
차준호/김진원 기자 chac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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