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디컬 고시’라 불렸던 대학 입학시험의 판도가 바뀌고 있다. 2026년 대학 입학 수시전형에 의대 지원자 수는 5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나타났다. 반면 전국 5개(DGIST, 켄텍, UNIST, GIST, KAIST) 과학기술원 수시 경쟁률은 5년 새 최고치를 찍었다. 졸업 후 SK하이닉스 취업이 보장되는 반도체 계약학과 경쟁률 역시 의대 경쟁률을 넘어섰다.
전문가들은 “AI 시대에도 살아남을 직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그동안 이어지던 ‘묻지마 의대’ 열풍이 한풀 꺾였다고 분석한다.
강남구에서 영어학원을 운영하는 주미영 씨는 “해마다 학부모들이 공통적으로 해오는 질문이 조금씩 바뀌는데 올해는 ‘우리 아이가 AI 시대에 무슨 직업을 가져야 할까요’였다”며 “엔비디아 주가가 2023년부터 2025년까지 큰 폭으로 상승했는데 마치 그 상승폭과 상관관계가 있는 것처럼 반도체 관련 학과의 수시 경쟁률도 동반 상승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에서 입시는 가장 솔직한 경기 후행 지표로 통한다. 한국에서 중공업이 활황기였고 수출이 경제를 먹여 살리던 시절에는 기계공학과나 전기전자공학과가 각광받았다. 1980년대에는 물리학과, 전자공학과, 기계공학과가, 1990년대 초에는 컴퓨터공학과, 전자공학과가 인기 학과 순위의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경제와 기술은 서로를 떠받치며 성장했다. 서울대 의대가 공대를 앞지른 건 1995년부터였다.
2010년대 후반부터 2020까지는 개발자 영입 전쟁으로 초등학생부터 너도나도 코딩을 배우는 게 유행이었다. 네카라쿠배(네이버, 카카오, 라인, 쿠팡, 배민)는 물론 스타트업까지 가세해 개발자 영입경쟁을 펼치면서 컴퓨터공학과 출신들의 몸값이 치솟았다.
지난 몇 년간은 의약학 계열이 ‘유일한 성공 보증 수표’로 통했다. 대학 졸업이 곧 취업 보장으로 이어지지 않는 시대인 만큼 높은 연봉과 정년을 보장하는 의치한약수(의대·치대·한의대·약대·수의대)가 이공계 인재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이미 대학에 합격하거나 졸업한 인재들까지 다시 의치한약수로 향했다. 지난해에는 의대 증원 여파로 SKY를 다니다 중도포기(탈락)한 학생이 2496명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올해 SK하이닉스 계약학과인 △고려대 반도체공학과 △서강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한양대 반도체공학과는 모두 올해 수시 모집에서 지난해보다 지원자가 늘었다. 종로학원에 따르면 세 학교 중 경쟁률이 가장 높은 곳은 서강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였다. 20명 선발에 970명이 지원했으며 경쟁률은 48.5대 1이었다. 지원자는 전년 대비 209명 많아졌다. 고려대 반도체공학과는 28명 모집에 337명이 지원했다. 가장 많은 지원자가 몰린 곳은 한양대다. 한양대 반도체공학과는 2026학년도 수시에서 32명을 모집했는데 1171명이 지원했다. 경쟁률은 36.59대 1이었다.
반면 의약학 계열은 의대뿐만 아니라 의치한약수 경쟁률이 동반 하락했다. 종로학원이 전국 109개 의치한약수 2026학년도 대입 수시 현황을 분석한 결과 지원자 수는 총 11만2364명으로 집계됐다. 전년 대비 21.9%(3만1572명) 줄었고 2022년 이후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경쟁률도 27.94대 1에서 25.81대 1로 하락했다.
특히 학과별로 보면 의대가 29.2%(2만1157명) 줄어 감소폭이 가장 컸다. 그나마 ‘인서울’ 의대는 지원자가 1.3% 줄어드는 데 그쳤지만 지방권 의대는 감소율이 대폭 늘었다. 경인권은 감소율이 42.0%, 충청권은 46.1%, 부산·울산·경남권은 38.9%를 각각 기록했다. 서울대 일반 학과보다 지방대 의대를 선호하던 경향이 줄어든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약대는 16.7%(7532명) 감소한 3만7510명이 수시에 지원했다. 한의대와 수의대는 각각 11.4%(1119명), 20.7%(1806명) 줄어든 8658명, 6910명이 지원했다.
반도체 계약학과의 정시 예상 합격선 역시 서울권 한의대와 약대 수준으로 평가된다. 종로학원에 따르면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의 경우 269점, 고려대 반도체공학과 269점, 성균관대 반도체시스템공학과 266점 등으로 전망됐다. 같은 조건에서 서울권 한의대 합격선은 269~276점, 약대는 266~279점으로 나타났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올해 의대 모집 정원이 전년보다 줄면서 지원자 감소는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실제 감소폭은 정원 확대 이전보다도 커 ‘묻지마 의대’ 현상이 다소 진정된 것으로 보인다”며 “특히 남학생들은 대기업 계약학과나 반도체 첨단학과 등 정부의 이공계 육성 정책에 맞는 학과로 이동하는 경향이 있고 여학생들은 여전히 의대 선호도가 상대적으로 높아진 모습”이라고 말했다.
결국 보상 체계가 그 사회 인재의 흐름을 결정짓는다. 올해는 3년간 이어져 온 AI 열풍과 SK하이닉스의 ‘파격 보상’으로 “공대에 가도 돈을 벌 수 있다”는 메시지가 사회에 번지면서 의대로만 향하던 상위권 수험생들의 지원 패턴까지 흔든 것이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와 챗GPT가 이끈 AI 시대에 유일하게 존재감을 내뿜는 대한민국 기업이었다. 고대역폭메모리(HBM) 주도권을 잡으며 주가는 5년간 328% 뛰었고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31년 만에 1위로 올라섰다. 올해는 평균연봉 1억원에 더해 성과급 1억원이라는 파격적인 보상책을 내놨다. 회사가 낸 영업이익의 10%를 직원들에게 돌려주겠다는 약속이었다.
메모리 반도체 주도권이 SK하이닉스로 넘어가면서 계약학과 경쟁률도 희비가 엇갈렸다. 삼성전자 계약학과 중 △고려대 차세대통신학과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성균관대 반도체시스템공학과 △성균관대 지능형소프트웨어학과 △경북대 전자공학부 모바일공학전공 등 5개 계약학과는 지원자가 전년 대비 감소했다.
업계에서는 계약학과 인기 현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한동안 반도체 석박사 인력이 급감하고 전기전자공학과 등 공대의 인기가 시들면서 산업 현장에 투입할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며 “그나마 가르쳐놓으면 더 많은 성과를 보장하는 해외 반도체 기업으로 이탈하곤 했는데 공대에 와도 충분한 보상이 따른다는 확신만 있다면 더 많은 인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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