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30일 경북 청송군 안덕면의 한 과수원. 5000평(약 1만6500㎡) 규모의 밭에는 너비 3m, 폭 약 1m 간격으로 부사, 시나노골드 등 다양한 품종의 사과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언뜻 보기엔 곧 수확을 앞둔 과실이 탐스럽게 익은 듯했지만, 가까이 다가가보니 사정은 달랐다. 표면이 매끈한 일반 사과와 달리 일부는 껍질이 녹슨 듯 거칠고 누런빛을 띠고 있었다. 올여름 기록적인 폭염으로 햇볕에 장시간 노출된 탓이다. 그 옆에는 지난봄 찾아온 냉해로 인해 꼭지 부분에 일자로 모양이 난 사과도 눈에 띄었다. 과수원 곳곳에는 기후 변화가 남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청송에서 10년째 사과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 김모 씨는 “지난 4월 열매가 수정될 시기에 갑자기 날이 추워지면서 제대로 결실을 맺지 못해 기형과가 많이 자랐다”라며 “동록(과피가 매끈하지 않고 쇠에 녹이 낀 것처럼 거칠어지는 현상)이 이렇게 선명하게 발생한 건 올해가 처음이다. 밭 전체의 30% 정도가 피해를 입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매년 예상치 못한 피해가 하나씩 나오는데 그때마다 뚜렷한 대응책이 없어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기후 변화가 심해지면서 농가의 시름도 깊어지고 있다. 냉해, 폭염, 불규칙한 장마 등이 반복되면서 노련한 농가들도 대응에 한계를 느끼고 있다. 올해는 출하량이 전년보다 늘어 사과 가격은 안정세를 보이고 있지만 크기·맛·색 등 품질이 낮은 사과가 많이 수확돼 농민과 소비자 모두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이다.
올 추석 기간 사과 가격은 지난해 대비 비교적 안정적인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2일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센터에 따르면 이번 추석 성수기(9월 22일~10월 5일) 사과 도매가격(홍로·상품·10kg)은 약 5만3000원으로 전년(5만5700원) 대비 약 5% 하락할 전망이다. 생육 여건이 작년보다 나아져 출하량이 늘어난 영향이다.문제는 양이 아닌 ‘질’이다. 기후 변화로 사과 주산지의 날씨 흐름이 달라지면서 과실의 생육 환경이 불안정해졌다. 사과는 연평균 8~11도 정도의 비교적 서늘한 기후에서 재배된다. 경북이 사과 주산지로 꼽히는 것도 조건에 맞는 온도와 큰 일교차 덕분이었다. 하지만 몇 년 새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 과거 청송의 여름은 8월 중순 무렵 잠깐 덥다가 곧 선선해졌지만 최근에는 6월 말부터 더위가 시작돼 9월까지도 폭염이 이어지면서 일소(햇볕 데임) 피해를 입은 사과가 많아졌다.
일명 ‘데인 사과’는 껍질이 거칠고 수분이 부족해 식감이 푸석푸석한 데다가 색도 선명하지 않아 상품성이 크게 떨어진다. 이를 막기 위해 농가에서는 그늘막 설치 등을 고려하고 있지만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 고민이 큰 상황이다.
9년째 사과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 이모 씨는 “꽃이 수정되려면 적정 온도가 필요한데 너무 더우면 암술이 말라서 수정 자체가 안 된다”라며 “이런 피해를 막기 위해선 그늘막 설치가 필수라고 생각하지만 견적을 받아보니 평당 200만원이나 돼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여기에 장마 양상도 달려졌다. 여름철 장마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 마른 장마로 바뀌었고, 9~10월에 집중호우가 오는 경우가 잦아지면서 농민들은 여름보다 ‘가을 장마’에 대비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한창 과일이 익을 시기에 비가 많이 오면 나무가 비료에 있는 질소 성분을 과다하게 흡수해 착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가지가 많이 자라면서 과실로 가야 할 양분이 빼앗기게 된다.
김 씨는 “수확량 자체는 예년과 비슷한데 제대로 된 색이나 모양을 갖춘 사과가 많지 않아 전체적으로 품질이 떨어졌다”라며 “실제로 사과를 사간 손님들이 ‘올해는 왜 이렇게 덜 다냐’, ‘맛이 푸석푸석하다’ 등의 반응을 자주 보여 고민이 큰 상황”이라고 말했다.

기후 변화로 인해 사과의 가격과 품질이 들쭉날쭉해지면 자연스럽게 소비자 수요에도 영향을 미친다. 실제 올해 사과 가격은 작년보다 소폭 낮아졌지만 소비자 수요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다. 지난해 ‘금사과’로 불릴 만큼 사과 가격이 치솟으면서 소비자들 사이에는 여전히 ‘사과는 비싸다’는 인식이 남아 있어서다. 이는 가격이 오를 때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가격이 하락할 때는 쉽게 체감하지 못하는 소비 심리 때문이다. 기후 변화로 가격이 한 번 크게 출렁이면 소비자들의 구매 결정이 더욱 위축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소비자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번 추석 성수기 가정용 과일류 구매 의향은 전년 대비 ‘감소’(35.7%)가 ‘증가’(9.5%)보다 훨씬 높았다. 과일 구매 의향이 전년보다 줄어든 이유는 ‘가격 부담’(62.1%)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그중에서도 사과의 가격 부담 응답 비중은 83.3%로 조사 대상 과일 중 가장 높았다.
강인규 경북대 원예과학과 교수는 “기후 변화가 이어지면 소비자들은 비싼 값을 주고도 맛이 부족한 과일을 먹게 되기 때문에 향후에는 구매를 줄이거나 수입 과일 등 대체 과일을 찾게 된다”라며 “소비가 줄게 되면 산업은 점차 쇠퇴하고 품종을 전환하는 농가도 많아진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일소 피해와 우박 피해 등을 줄이는 연구를 통해 농가 피해를 최소화하고 생산량과 품질을 안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수림 한경닷컴 기자 paksr36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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