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월교도소에서 처음 만난 피고인의 두 손을 잡고 ‘죽였습니까, 안 죽였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정말 안 죽였다. 제발 도와달라’는 답변이 돌아왔죠. 그 한마디가 변론의 출발점이자 원동력이었습니다.”
1심 ‘무기징역’, 2심 ‘무죄’. 형사재판에서 보기 드문 결과다. 무려 20년간 미제로 남아 있다 최근 용의자가 특정된 이른바 ‘영월 농민회 간사 피살 사건’이어서 더욱 이목을 끈 판결이었다. 1, 2심 모두에서 피고인 송모씨를 대리한 이태훈 법무법인 YK 변호사(변호사 시험 4회)는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모든 증거가 피고인의 유죄를 의심할 여지 없이 증명해야 함)’이라는 형사재판의 대원칙을 재확인한 사례”라며 “정밀한 검증을 거친 과학적 증거가 법원 판단에 결정적으로 작용한 ‘리딩 케이스’가 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당시 이 사건은 증거가 부족해 미제로 남겨졌다. 사건 현장엔 여러 점의 족적이 남았는데, 경찰은 용의자를 특정하지 못했다. A씨는 족적과 일치하는 샌들의 주인이었지만, 그가 범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다.
그러다 2020년 6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현장에서 채취한 족적과 송씨의 샌들 간에 17가지 특징점이 99.9% 일치한다는 분석 결과를 내놨다. 강원경찰청 미제 사건 전담수사팀은 이를 토대로 A씨를 다시 소환해 재수사에 착수, 같은 해 11월 검찰에 송치했다.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 고심하던 검찰은 족적 관련 추가 감정과 혈흔, DNA 분석, 통신 내역 등 보강 수사를 거쳐 3년 7개월 만인 작년 7월 A씨를 기소했다.

올해 2월 1심은 A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법원은 샌들 족적과 관련해 “생활하면서 찍힌 마모흔, 손상흔(찍힘흔, 긁힘흔)은 우연히 생성된 것이어서 다른 신발이라 할지라도 그 지점에 하나 정도는 우연히 생길 수 있다”면서도 “17군데씩이나 동일한 위치에 마모흔, 손상흔이 있고 그 형태와 방향성이 일치한다면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송씨를 범인으로 특정하는 증거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족적 분석에서 17개 특징점이 확인되는 경우는 지문 분석에서 23개 이상의 특징점이 확인되는 경우와 확률적으로 같고, 통상 지문 분석에선 12개 이상의 특징점이 확인되는 경우 동일 지문으로 판단한다”며 송씨가 족적의 주인이라는 감정 결과가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봤다.
재판부는 “살인죄와 같이 법정형이 무거운 범죄는 직접 증거가 없는 경우 합리적인 의심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의 간접 증거에 따른 증명이 있어야 하고, 하나하나의 간접 사실은 상호 모순, 저촉되지 않음과 동시에 논리와 경험칙, 과학 법칙에 의해 뒷받침돼야 한다”고 전제한 뒤 “족적 동일성 여부 등에 관한 감정 결과를 비롯한 여러 정황만으로는 공소사실을 뒷받침하는 적극적 증거로서 충분하다고 보기 부족하다”며 1심과 다른 판단을 내놨다.
재판부는 “지문이나 DNA 감정 결과 등 다른 보강 자료 없이 오로지 족적 동일성 여부 등에 관한 감정 결과만으로 피고인을 범인으로 특정하기엔 부족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족적과 샌들 간 동일성 여부에 대한 5차례의 감정에서 일관된 결과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2022년 대검찰청 감정도 2심 공감정과 같이 족적과 샌들이 동일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봤다. 나머지 세 차례 감정에서도 감정 때마다 발견된 개별 특징점 개수가 달랐다.

무엇보다 기존 족적 감정은 샌들의 족적을 직접 스캔하거나 잉크 등으로 백지에 압날해 채취한 사진 파일을 족적과 ‘육안’으로 비교하는 방식이었는데, 재판부는 “현장 족적을 전사판에 채취해 복원하는 과정에서 원본의 형태가 그대로 유지됐다고 단정하기 어려워 보인다”고 지적했다. 또 “샌들을 백지에 압날할 당시 피고인이 아닌 제삼자가 샌들을 신은 채로 진행됐는데, 샌들의 족적도 원본 형태가 변형됐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고 짚었다.
이 변호사는 “‘과학수사’를 한 것으로 알려지긴 했지만, 실제 감정은 육안으로 이뤄졌다”며 “같은 증거물로 감정을 반복했는데, 결과가 달랐다면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샌들이라는 공산품의 특성상 공장에서 처음 출하될 때부터 찍힘흔과 긁힘흔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존재하는 점 △피고인 샌들의 마모흔은 일반적으로 흔히 나타나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점 △일부 감정에서 범행 현장 족적과 피고인 샌들 바닥면 간의 동일성을 수치화하는 것은 어렵다는 견해를 밝힌 점 등 변호인단이 내세운 주장 대부분이 항소심에서 받아들여졌다.
재판부는 “족적 감정 결과는 피고인이 이 사건 범행 전후로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에 불과하며, 피고인이 피해자를 살해했다는 사실까지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결론지었다. 송씨의 샌들에서 피해자의 혈흔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점, 살해 도구가 끝내 발견되지 않은 점도 주요 근거로 작용했다.

재판부는 사건이 발생한 2004년에 이미 족적과 송씨의 샌들이 일치한다는 감정 결과가 있었음에도 수사기관이 송씨의 자택을 압수수색해 범행 도구를 확보하지 않은 점 등 초동 수사가 진했던 점도 지적했다. 당시 피해자의 의복이나 손톱 등에 대한 DNA 검사나 영농조합 사무실 곳곳에 대한 지문 감식 등도 이뤄지지 않았다.
사건 발생 당시 영월의 한 계곡에서 가족 여행 중이었다는 송씨의 알리바이도 인정됐다. 검찰은 계곡에서 찍힌 송씨의 사진이 조작됐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진의 촬영 시각, 송씨의 통신 기록, 계곡에서 범행 현장까지 차량으로 가는 데 걸리는 시간 등을 토대로 송씨를 범인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변호인단의 주장이 공소사실을 모두 배척한 것이다.
검찰이 상고해 이 사건은 대법원 판단을 받게 됐다. YK는 상고심까지 송씨를 대리해 상고 기각 판결을 이끌어내겠다는 방침이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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