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의 탄소 의존은 무지의 결과가 아닌, 산업화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1990년대 이후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 태국 등은 연 5~7%의 고성장을 기록하며 ‘제2의 중국’으로 불렸다. 이 성장의 동력은 값싸고 안정적인 전력이었다. 그러나 수력은 건기에 마르고, 태양광은 설비비가 비쌌으며, LNG는 인프라가 부족했다. 결국 남은 것은 석탄이었다.
인도네시아는 세계 3위의 석탄 수출국으로 매년 4억 톤을 캐내 그 절반을 자국 발전소에 썼다. 베트남의 꽝닌(Quang Ninh), 필리핀 루손(Luzon) 섬, 태국 라용(Rayong) 등에는 석탄화력발전소가 밀집해 지역 경제의 중심이 됐다.
2010년대 초 아세안 전력의 70% 이상이 석탄과 천연가스에서 나왔다. 그 덕에 공장이 세워지고 중산층이 늘어났지만, 환경 문제가 불거졌다. 방콕의 폭염, 메콩강 삼각주의 침식, 필리핀의 초대형 태풍 등, 온실가스 배출이 급증하면서 기후변화의 직격탄을 맞은 것도 이 지역이었다.
이제 아세안은 탄소를 줄이는 경쟁에 나섰다. 열 개국 중 필리핀과 미얀마를 제외한 여덟 나라가 탄소중립을 선언했다.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라오스, 캄보디아, 브루나이, 싱가포르는 2050년, 인도네시아는 2060년, 태국은 2065년을 목표로 했다. 유럽연합의 탄소 국경조정제도 시행과 글로벌 기업들의 ‘RE100’ 요구로, 아세안의 탈탄소화는 단순 선언이 아닌, 무역과 투자를 위한 전제 조건이 되었다.
하지만 현재 전력 사용량을 줄일 수는 없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35년까지 세계 전력 수요 증가의 4분의 1이 동남아에서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는데, 이 지역의 전력 소비는 이번 세기 중반에는 유럽을 넘어설 전망이다. 냉방 수요는 연중 지속되고, 산업단지와 관광 인프라도 24시간 돌아간다. 전기를 끊을 수도, 성장을 멈출 수도 없다. 그래서 아세안은 감축이 아닌 대체의 전략을 택했다. 석탄에서 LNG로, LNG에서 재생에너지와 원전으로, 그리고 국가 간 전력망을 연결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들이 추진되고 있다.
아세안은 2045년까지 역내 전력망을 완전히 통합하는 ‘아세안 파워그리드(ASEAN Power Grid)’를 추진하고 있다. 18개의 상호연결 프로젝트 중 절반 이상이 이미 완공되었고, 나머지도 진행 중이다. 한 나라의 햇빛이 다른 나라의 공장을 돌리고, 수력이 이웃 도시를 밝히는 구조가 점차 현실이 되고 있다.
싱가포르는 이미 라오스와 말레이시아에서 재생 전력을 수입하며, 2035년까지 전력의 3분의 1(6기가와트)을 해외에서 조달할 계획이다. 라오스의 계곡엔 수력댐이, 베트남 해안엔 풍력 터빈이, 태국 평원엔 태양광 패널이 끝없이 늘어서 있다. 태국은 전력의 15% 이상을 태양광과 바이오매스로 충당하고, 라오스는 전력의 80%를 수력으로 생산해 이웃 국가에 수출한다. 말레이시아 사라왁(Sarawak)주는 대규모 수력 기반 전력을 해저 케이블로 싱가포르에 공급하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며, 베트남은 풍력과 태양광을 결합한 복합 에너지 단지를 확장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라오스의 몬순(Monsoon) 풍력 발전소는 변화의 상징이다. 600메가와트 전력을 생산해 27킬로미터 국경선을 넘어 베트남으로 수출하는 이 프로젝트에는 태국 IES, 일본 미쓰비시상사, 중국 파워 차이나, 아시아개발은행이 참여했다. 한 나라의 전기가 아닌, 여러 나라가 참여하여 함께 생산하고 공유하는 에너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아시아개발은행은 향후 10년간 100억 달러 규모의 전력망 통합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말레이시아·싱가포르·베트남은 ‘라오스?태국?말레이시아?싱가포르 전력 통합’을 다자간 전력 거래 체계로 확장하고 있다. 여기에 한국, 일본, 미국, 중국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아세안의 탈탄소화는 기술 외에도 정치, 자본, 그리고 국제 협력의 조율이 필요한 대전환이다. 각국은 에너지 안보를 지키면서도 국제사회의 탄소 배출 감축 압력에 대응해야 하고, 기업은 그 틈에서 새로운 산업의 기회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재생에너지만으로는 불안정하다. 날씨에 따라 출력이 달라지는 전원을 보완하려면 안정적인 기저 전원이 필요하다. 이때 다시 주목받는 것이 원자력이다.
필리핀은 1980년대 완공된 바탄(Bataan) 원전의 재가동을 검토하며 한국수력원자력과 안전성 평가를 마쳤고, 인도네시아는 신수도 ‘누산타라(Nusantara)’ 인근에 소형모듈 원자로(SMR) 건설을 추진하며 미국의 NuScale과 한국의 SMART 기술을 비교 중이다. 베트남은 중단된 닌투언(Ninh Thuan) 원전 계획을 재검토하고, 태국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멈춰 있던 연구를 다시 시작했다. 말레이시아는 2040년대 중반 원자력 도입을 정책적 옵션으로 남겨두었고, 싱가포르는 해상형 SMR과 핵융합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이들의 관심은 대형이 아닌 소형·분산·안전형 원전이다. 도서와 산악이 많은 지리적 조건에서 SMR이 현실적 해법인데 여기에 우리의 기회가 있다. 한국형 소형모듈 원자로 SMART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인증을 받은 설계로, 아세안의 분산형 전력 체계에 최적화돼 있다. 한전기술, 한수원, 두산에너빌리티는 SMR과 에너지저장장치(ESS), 스마트그리드 기술을 결합한 통합형 청정전력 패키지로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아세안의 전력 전환은 발전소 건설이 아니라 에너지 시스템의 재설계인데, 기술, 자본, 정책이 함께 작동해야 완성된다. 이런 복합 구조 속에서 한국의 강점은 단순한 발전 기술에만 있지 않다. 원자로, 스마트그리드, 해저케이블, ESS, 수소·암모니아 혼소, 탄소 포집(CCUS) 등 통합형 청정에너지 솔루션을 설계할 수 있다. 한국은 기술력과 운영 경험, 그리고 금융 협력 역량을 두루 갖춘 몇 안 되는 파트너다.
가뜩이나 ‘AI 혁명’으로 전 세계 전력 수요가 폭증하고 있다. 인공지능, 데이터센터, 반도체, 전기차 산업이 요구하는 에너지는 결국 안정적이고 청정한 전력으로 귀결될 것이며, 동남아 전력 시장은 무한한 확장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아세안의 시급한 脫탄소화 전략은 우리에게도 큰 기회가 될 것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이성득 인도네시아 UNAS경영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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