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홍콩 센트럴에 문을 연 ‘아트 특화 빌딩’ H퀸즈는 아시아 미술시장에서 홍콩이 차지하는 압도적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였다. 이 빌딩의 자랑은 5층에서 17층까지를 가득 메운 세계적인 갤러리들. 홍콩을 방문한 미술계 관계자들은 반드시 이곳을 들러야 했고, 아트바젤 홍콩과 같은 대형 미술 행사가 있는 주간에는 빌딩 바깥까지 엘리베이터에 타려는 사람들의 긴 줄이 늘어섰다.
하지만 ‘홍콩 미술시장의 영광’을 상징했던 이 건물은 지금 비어가고 있다. 미국 뉴욕과 영국 런던 등 세계 각지에 지점을 둔 글로벌 갤러리인 페이스는 최근 “오는 19일 H퀸즈에 입점한 홍콩 지점의 운영을 종료한다”고 발표했다. 홍콩 미술시장 경기가 악화하면서 상설 갤러리를 유지하는 수지타산이 안 맞게 됐기 때문이다. 앞서 하우저앤워스, 화이트스톤, 펄램 등 다른 유력 갤러리들이 이 빌딩을 떠난 이유와 동일하다. 지금 이곳에 남은 갤러리는 불과 두 곳. 홍콩 미술시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페이스, 페로탕…홍콩 ‘탈출 러시’
페이스는 최근 1년 새 홍콩 지점을 폐쇄한 글로벌 화랑들 중 세 번째다. 지난해 말에는 영국 런던 기반의 레비 고르비 다얀 갤러리가 홍콩에서 철수했다. 또다른 글로벌 갤러리인인 페로탕도 지난 1일 홍콩 지점의 문을 닫았다. 중국 미술시장은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크고, 여전히 홍콩은 중국 컬렉터들을 만날 수 있는 대표적인 관문이다. 그런데도 글로벌 화랑들이 홍콩 지점을 폐쇄한다는 건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단 얘기다.
홍콩은 2019년 민주화 운동 이후 ‘중국화’되면서 점차 아시아 미술시장 중심지로서의 힘을 잃기 시작했다. 여기에 최근의 급격한 침체가 겹쳤다. 지난해 중국 미술품 거래액은 84억달러(약 12조3200억원)로 전년 대비 31% 쪼그라들었고, 올 들어서도 맥을 못 추고 있다. 지난달 열린 크리스티·소더비·필립스 등 홍콩내 3개 주요 경매사의 가을 경매 총액은 10억6126만홍콩달러(약 1954억원). 지난해 16억2064만홍콩달러(약 2983억원) 대비 34.5% 급감한 숫자다. 글로벌 미술 전문지 아트뉴스페이퍼는 “세계 미술시장 침체와 중국 부동산 경기 침체, 사치를 죄악시하는 중국 정부의 지침으로 인해 구매가 급감했다”고 분석했다.


다만 페이스는 “홍콩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건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비록 상설 갤러리 공간은 없지만 사무실을 유지하며 지역 고객 관리를 이어나갈 것이라는 설명이다. 중국 미술시장이 좋아지면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뜻이다. 페로탕은 “이전 지점의 임대 계약이 만료된 걸 계기로 잠깐 문을 닫았고, 지금 더 좋은 자리를 알아보는 중”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중심은 서울·도쿄?
중화권 미술시장은 전반적인 하향세다. 매년 초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아트SG는 지난 1월 열린 올해 행사에서 저조한 실적을 거뒀다. 대만 최대 아트페어 ‘타이베이 당다이’는 내년 행사를 열지 않기로 했다. 사실상의 폐지 수순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대안으로 떠오른 건 한국이다. 지난달 초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프리즈 서울(프리즈)에는 8만2000여명의 관객이 몰렸다. 미술시장 불황에도 불구하고 기대 이상의 판매 실적을 거뒀다는 평가다. 일본의 약진도 두드러진다. 페이스의 최고경영자(CEO)인 마크 글림처 대표는 최근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와의 인터뷰에서 “2024년 도쿄 아자부다이 힐즈에 일본 지점을 열었는데 판매 실적이 매우 좋다”며 만족감을 표했다. KIAF-프리즈가 끝난 직후 요코하마에서 열린 국제 아트페어 ‘도쿄 겐다이’ 역시 준수한 실적을 거뒀다.
최근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아시아 미술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지난 2~4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아트페어 ‘아트 자카르타’에는 에스더쉬퍼를 비롯한 글로벌 화랑 여럿이 새롭게 참가했다. 한국 갤러리도 열 곳 넘게 참가했다. 올해 행사에 참석한 한 갤러리 관계자는 “세계 미술계가 동남아시아를 ‘기회의 땅’으로 보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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