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많은 이들이 미술을 ‘해석해야 하는 것’ ‘답을 내려야 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날이 갈수록 작가는 그럴싸한 의미를 설명하느라, 관객은 이해하려 애쓰느라 바쁘다. 작품은 더 복잡해지고, 무의미한 해석이 쌓여간다. 하지만 본래 미술은 언어보다 먼저 와닿는 직관의 예술. 난해한 개념이나 이론 없이 힘찬 필치 하나만으로 감정을 전할 수 있는 게 회화다. 때때로 순수한 시선만으로 그림을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노은님(1946~2022) 3주기 회고전 ‘빨간 새와 함께’는 이런 미술의 원초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 간결한 점과 선, 강렬한 색채로 무한한 자연과 생명의 흔적을 화폭에 담아낸 회화가 걸려 있어서다.
노은님의 예술엔 수사와 부연이 배제돼 있다. 무엇을 그리겠다는 의도에서 시작한 그림이 아니라 그저 보고 느낀 걸 꾸밈없이 펼쳐냈기 때문이다. 생전 ‘살아남기 위해 전쟁터 병사처럼 싸울 필요는 없다. 오히려 풀밭에서 뛰노는 어린아이 같아야 한다’고 적었던 노은님의 한 마디가 그의 이런 작업세계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대가 백남준이 노은님에게 매료된 것도 그의 그림이 오래전 동굴벽화처럼 단순하면서도 직관적이었기 때문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백남준은 1979년 프랑스 파리에서 박명자 현대화랑 회장에게 “독일에 노은님이라는 그림 잘 그리는 여자가 있다”고 넌지시 말했다. 노은님은 이후 1980년 현대화랑에서 백남준과 2인전을 열었고 1984년에는 백남준, 요셉 보이스와 ‘평화를 위한 비엔날레’에 참여하며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전시에선 ‘화가 노은님’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 노은님은 그간 국내 화단에서 ‘파독 간호사’ 출신의 화가로만 기억돼 왔다. 노은님이 20대였던 1970년 독일로 이주해 간호보조원으로 3년간 일하며 향수를 달래기 위해 그림을 독학한 것은 맞지만, 예술가로서 노은님이 완성된 건 1980~1990년대다. 한국인 최초로 독일 함부르크 미술대학의 정교수로 임명되고, 함부르크의 유서 깊은 건축물인 알토나 성 요하네스 교회에 480장으로 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영구 설치하는(1997년) 등 예술가로서 절정의 시간을 맞이한 것도 이때의 시간이 바탕이다.

전시장엔 노은님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이 시기(1980~1990년대)에 완성한 평면 작업 20여 점이 걸렸다. ‘헤엄치는 오리’, ‘검정 고양이’ 등 그의 회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새와 고양이, 오리 등을 장식적 요소 없이 간결하게 표현한 그림들이다. 검정, 빨강, 파랑, 하얀색의 굵은 선이 인상 깊다. 권준성 노은님 아카이브 관장은 “노은님은 이때를 생명을 그리는 시기라 했다”며 “(네 가지 색깔은) 물, 불, 공기, 흙 등 4원소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이 만물이 네 가지 원소로 이뤄져 있다는 주장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현대화랑 관계자는 “동양의 명상과 독일의 표현주의를 연결하는 노은님의 화면에는 생명력이 넘친다”면서 “하늘을 헤엄치는 물고기나 물속에서 날개를 퍼덕이는 새 등은 예술가로 타고난 화가 자신의 존재와 생명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형상”이라고 설명했다. 전시는 11월 23일까지.
유승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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