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10월 15일 11:41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지난 9월 초 K 바이오 혁신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보건복지부, 중소벤처기업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들과 유관 기관장들이 참석하였습니다. 바이오가 현 정부의 핵심 육성 산업인 A(인공지능), B(바이오), C(콘텐츠), D(방산), E(에너지) 중 하나라며 마련된 자리였습니다. 보건복지부 장관은 바이오시밀러와 위탁개발생산(CDMO) 역량을 기반으로 글로벌 블록버스터급 신약 개발을 앞두고 있다며, 인공지능(AI)을 통한 심사 기간 단축과 신약 개발 전 주기에 걸친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기술 대전환 가속화와 데이터 활용 활성화도 주문했습니다.
바이오 업계는 규제 혁신과 성장에 대해 애로사항과 주문을 쏟아냈습니다. 위탁생산에 대한 규제 완화, 상장 심사와 사후 감시 기능 이원화, 모태펀드 활성화, 구조조정 중에 있는 석유화학 산업 자원의 활용 등이 나왔습니다. 신약의 유효성과 안전성 확보를 위한 국가 보건의료 데이터 정보 공개, 네거티브 시스템 전환, AI 학습 데이터 접근성 보장도 나왔습니다. 한국이 아시아-태평양 의약청 설치를 주도하여 시장을 키우자는 제안도 등장하였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스타트업, 연구기관까지 한 자리에 모였으니 각자의 상황에 따라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을 겁니다. 1시간 20분여의 자리는 깊이와 폭 측면에서 제한이 너무 큰 아쉬운 자리였습니다. 그동안 바이오 산업은 CDMO와 바이오시밀러 중심으로 성장해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기술과 자본과 인력이 제대로 연결된 생태계가 구축되어야 하고, AI 기반 신약개발과 데이터 공유 등 산업 전반의 체질 개선을 논의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입니다. 바이오는 인류 건강은 물론이고 산업 전반에 걸쳐 다양한 영역까지 걸쳐 있습니다. 그리고 AI 시대의 바이오 산업의 본질과 방향성이 근본적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은 분야입니다.
바이오 기술을 크게 레드 바이오(Red Bio), 화이트 바이오(White Bio), 그린 바이오(Green Bio)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레드 바이오는 인체에 관한 것이고, 화이트 바이오는 전통 제조업에 관한 것이고, 그린 바이오는 소위 먹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레드 바이오는 치료용 단백질, 백신 및 인슐린과 같은 의약품, 질병을 조기에 발견하는 정밀한 진단 기기, 재생용 조직과 장기, 유전 질환 교정과 항암용 세포 변형, 개인 유전자 구성에 맞는 치료와 약물 맞춤화에 개입됩니다. 우주 못지않게 심오한 인체에 관한 것이기에 가장 난해합니다. 화이트 바이오는 에탄올, 디젤, 수소와 같은 분야의 재생 에너지, 섬유 등 산업용 효소 등의 물질 생산에 관여됩니다. 전통 제조 분야, 특히 화학산업과 연관이 큽니다. 그린 바이오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농작물 수확량 증대, 영양 개선, 해충과 질병, 가혹한 환경에서도 살아남는 유전자 변형 작물, 식품의 맛과 유통기한 개선, 질병 퇴치용 가축용 백신에 관여됩니다. 이외에도 바이오 기술은 오염된 토양과 물을 정화하고 폐기물을 처리하는 데에도 등장합니다.
이처럼 바이오는 적용 범위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따라서 지난 간담회는 말 그대로 레드 바이오에 한정된 것입니다. 국가바이오위원회 부위원장은 전 세계 화학 시장이 9천조원, 농식품 시장이 1경3천조원이라며 이런 시장도 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하지만 공감할 기업인들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기존 기업들이 이미 화이트 바이오와 그린 바이오를 활용하며 아쉬움이 별로 없는 기업인들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레드 바이오는 다릅니다. 한국 기업들은 아직 글로벌 존재감이 너무 미약합니다. 그리고 인체를 대상으로 하기에 규제의 벽이 높고 기술 혁신과 상용화에 엄청난 인고의 시간이 걸립니다.
지금 레드 바이오는 선진국의 독무대나 마찬가지입니다. 부가가치가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파이낸셜 타임즈는 지난 9월 초 ‘AI는 왜 신약 발견에 몸부림치는가? (Why is AI struggling to discover new drugs?)’라는 기사에서 지난 10년 간의 신약 개발 시장과 향후 전망을 다루었습니다. 어떤 스타트업 CEO는 근본적으로 사람들은 인간 생물학의 복잡성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풀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주 탐사를 제외한 어떤 산업 중에서도 실패율이 가장 높은 산업으로, 이제야 우주 탐사가 작동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그 중심에 AI가 있습니다.

선진국들이 AI를 기반으로 한 신약 발견에 천문학적 규모의 돈을 쏟아부었던 것은 고령화 때문입니다. 고령화는 필연적으로 의료비를 증가시킵니다. 이런 원대한 꿈을 안고 수많은 스타트업들이 등장하였습니다만 지금까지 AI가 발견한 신약 후보는 거의 없고 승인된 후보는 단 한 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기업들이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물학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인간 세포의 상호 작용 방식에 많은 미스터리가 있으며, 인체의 가장 중요한 과정을 측정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는 한계 때문입니다.
그런데 2022년 말 등장한 챗GPT의 생성형 AI를 기반으로 약물을 설계하는 새로운 붐이 일었습니다. 생물학적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통해 마침내 황금알을 낳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겁니다. AI의 가장 큰 매력은 분자 데이터베이스를 빠르게 통과하여 화합물을 표적과 일치시키는 데 있습니다. 기존의 AI 응용 프로그램 중 상당수는 챗GPT가 인터넷의 언어에서 학습하거나 알파고가 바둑을 두는 것과 같이 ‘컴퓨터 비트(bit)와 비트 사이의 만남’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신약 발견은 ‘비트가 원자(atom)를 만나는’ 곳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더 힘듭니다. 인체라는 ‘원자’를 상대로 축적된 수천 수만 개의 서로 다른 데이터베이스를 저글링하고 알고리즘을 사용하여 콘텐츠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데 엄청난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두 가지 중요한 진전으로 바이오 시계가 다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나는 노벨상을 수상한 단백질 접힘 예측(protein-folding prediction) 엔진인 알파폴드를 구글 딥마인드에서 출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2022년부터 시작된 생성형 AI의 폭발적인 증가입니다. 설계된 약물이 승인될 준비가 되기까지는 여전히 수년이 걸릴 것입니다. 그래도 예전보다 가용 데이터가 많아졌다는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알파폴드를 가능하게 했던 핵심 요소 중 하나는 이미 존재하였던 방대하고 잘 라벨링된 단백질 데이터 베이스였습니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스타트업들과 차세대 기업들이 데이터 생성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성공적인 약물을 만들려면 돈과 컴퓨팅 파워가 필요합니다. 당장 수익을 내지 못하더라도 수십 년 분량의 데이터 생성을 해낼 수 있는 곳 말입니다. 레드 바이오 역시 기술 혁신과 성장을 위해서는 고도의 AI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바이오에 희망을 불어넣고 있다는 AI는 지금 어떤 단계에 와 있을까요? 정부 AI 컨트롤 타워인 하정우 수석의 대담집 ‘AI 전쟁 2.0’에서 그 변화를 제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2022년 말 등장한 챗GPT의 근간인 대형언어모델(LLM)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모델은 주로 사전 사후 학습을 통해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고, 다국어 언어를 이해하고, 텍스트를 생성하고, 간단한 수리적 사고와 낮은 수준의 논증적 글쓰기가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2024년 9월에 등장한 오픈AI의 거대 추론 모델(LRM)은 말 그대로 ‘생각하는(thinking) AI’입니다. 스스로 단계적으로 긴 논리적 사고의 흐름을 거치며 더 좋은 표현이나 풀이 방법을 찾기도 하고, 내용을 검증하는 등 더 복잡하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겁니다.
생각하는 AI가 가능해진 것은 호흡이 긴 고품질의 생각의 사슬(Chain of Thinking)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강화 학습 덕분입니다. 기존에는 주로 영어 기반의 인터넷 텍스트만을 기반으로 했던 것을 이제 다양한 언어 텍스트와 영상, 음성, 시계열 등 다양한 유형의 데이터들까지 동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데이터를 생성하는 수준까지 이르렀습니다. 기존 데이터 수준을 넘어서 더욱 우수한 합성 데이터를 스스로 생성하고, 이를 활용하여 강화 학습 과정에서 더 많은 연산 자원과 컴퓨팅 리소스를 활용하게 됩니다. 즉, AI가 자가 경험을 통해 데이터를 형성한다는 것인데, 인간 지능 수준의 AGI로 가는 무시무시한 문이 열리고 있다는 겁니다.
AGI 시대는 빠르면 2~3년 늦어도 5년 후에는 도래한다고 합니다. AI 에이전트 등장이 그전조입니다. AI 에이전트는 LLM과 LRM이라는 두뇌를 기반으로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여 사람들의 업무를 자동화할 수 있는 지능형 애플리케이션입니다. 이 AI는 특정 일에 대해 기억은 물론이고 계획(planning), 추론(reasoning), 행동(action), 평가(reflection), 실행(execution) 기능을 갖추게 됩니다. 기업은 다양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일을 수행하는 구조입니다. 각각의 능력을 대체하는 AI 에이전트가 한 데 모이면 AGI가 됩니다. 이런 AGI가 등장하면 기업의 운영 방식은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미국과 중국이 패권 전쟁을 벌이는 것도 이런 AI 진화 때문입니다. 미국은 오바마 정부 때부터 트럼프 정부까지 강력한 리더십을 유지해야 한다는 큰 틀에서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민간이 주도하는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는 5천억 달러 규모입니다. 중국은 뒤늦게 출발하였지만 규모와 정부 주도의 초압축 추격으로 이제 미국을 누를 기세입니다. 특히 딥시크의 출현이 충격적이었습니다. 미국 빅테크처럼 엄청난 자금 투입이 아니더라도 AI를 리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며 미국과 중국 이외의 3위권 국가들에게 자신감과 가능성을 심어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내세운 AI MAGA 전략이 각국의 소버린 AI 투자 가속화의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은 싱가포르, 프랑스, 영국, 캐나다, 독일과 더불어 3위권입니다. 하지만 연구개발 역량은 10위권 바깥입니다. 제도와 인프라는 괜찮은 편인데 상업화가 벽에 부딪혀 있습니다. 2년 전 한국은 초거대 AI를 처음부터 개발한 나라로는 미국 중국에 이어 3위였으나, 챗GPT 등장 이후 달라졌습니다. 2022년 이후 파운데이션 모델 등장으로 세계 각국이 급속도로 움직였습니다. 한국은 AI라는 100미터 달리기에서 초반 10미터까지는 1등이었으나 이젠 추월당한 상황입니다.
3위권의 선두인 싱가포르는 국가 AI 총괄 책임자를 두고 AI 거버넌스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딥시크 부상 전까지 메타와 함께 오픈소스 AI 분야를 양분했던 미스트랄을 둔 프랑스는 숙명의 앙숙인 독일과 함께 제조업을 혁신하여 유럽을 주도하고자 합니다. 영국은 올해 ‘AI 기회 행동 계획’을 내세워 총리실과 과학혁신기술부 합동으로 소버린 AI 전담팀 구성하고 1985년생을 책임자로 임명하며 실행에 방점을 두었습니다. 캐나다는 AI 아버지로 노벨상을 수상한 제프리 힌튼이 버티고 있는 기초 분야의 리더입니다. 독일은 방대한 제조 데이터와 탄탄한 산업을 기반으로 제조와 에너지 등 현장에서 즉각 효과를 낼 수 있는 산업용 AI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AI 변방이던 일본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2021년에 이미 디지털청이 설립되었고, 1,200여 명의 인력 중 절반가량이 민간 출신입니다.
그런데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비즈니스 대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꿈에 그치게 됩니다. 아직 제조업 등 전통 산업에서는 활용이 충분하지 않습니다만, 결국 AI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은 산업용 AI 에이전트가 얼마나 빠르고 효과적으로 확산되느냐에 좌우될 것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이 오픈AI와 앤트로픽 등 AI 모델 기업들과 동맹을 맺고 있는 이유입니다. 이들 빅테크는 수십억 명을 상대로 하는 플랫폼과 강력한 데이터를 보유한 하이퍼스케일러입니다. 작년과 올해 노벨상 수상자 다섯 명을 배출한 구글은 기술개발에 전념하던 딥마인드에 제품화까지 추진하도록 하였습니다. 딥마인드는 이미 바이오와 화학과 재료 분야에서 잠재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국은 실질적으로 위협이 되고 있는 존재입니다. 미국의 전유물이다시피 한 오픈소스 생태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전 세계로 영향력을 확장하는 ‘AI판 실크로드’ 전략을 펼치고 있습니다. 중앙집중형 정책, 과학자와 기술자 존중 사회, 800조원에 달하는 투자 규모 등은 다른 나라가 따라하기 힘든 것들입니다. AI의 진정한 힘은 기술 그 자체보다는 얼마나 빠르게 산업과 일상생활에 녹아 들어 실질적인 부가가치를 창출하느냐에 있습니다. 중국은 미국보다 훨씬 더 빠르게 AI를 산업화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렴한 모델을 개발한 딥시크 등장 이후 지방정부와 기업들이 앞다투어 도입하고 있습니다. 산업화를 통해 생산된 엄청난 양의 데이터는 재학습 과정을 거쳐 AI 경쟁력을 높이게 됩니다.
이제 AI는 단순한 기술을 넘어 경제와 산업, 문화는 물론 국방과 안보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핵심 기반이 되었습니다. 각국은 AI 모델 자체를 안전하게 만들겠다는 ‘세이프티(safety)’ 관점에서 국가 안보의 관점에서 AI 기술 강화가 절대 우선이라는 ‘시큐리티(security)’ 관점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AI는 생성형 모델을 넘어 에이전트 기반 시스템으로 진화 중입니다. 이 에이전트들은 자율성과 자기 개선 능력을 갖추며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단계로 갈 수도 있습니다. 한국이 자칫 인터넷이 없거나 전기를 사용할 수 없거나 인프라가 부족한 나라와 다름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산업이나 기술에 우선하여 AI 기술 육성을 특별히 지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국은 AI 변방은 아닙니다. 국가AI위원회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술을 관료적인 사고방식과 정치적 이해관계 중심으로 보고 접근하려 합니다. LG와 네이버, 카카오 등은 개별 기업들의 기술력은 이미 상당한 수준입니다만, 글로벌 리더들이 누리는 엄청난 규모의 컴퓨팅 파워와 데이터 축적 인프라 수준은 한참 떨어집니다. 인프라 수준과 밀접한 인재도 문제입니다. 해외 인재는 국책 연구재단에 아래아한글로만 자료를 내야 하는 현실에 좌절합니다. 샌드박스를 만들어 자유롭게 기술을 테스트하자는 구호가 반복됩니다만 매번 실패합니다. 인재들이 그곳에 갈 만한 동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바이오와 AI는 갈 길이 험난합니다. 인프라 구축과 인재 유치에 정부가 나서야 하는 이유입니다. 단군 이래 최대 규모라는 국민성장펀드 150조 원 중 AI 30조, 반도체 20.9조, 바이오 11.6조 등 70조 원 이상이 AI와 바이오 관련 산업에 투입됩니다. 지역 특화 산업인 호남의 AI데이터센터까지 더하면 규모는 더 커집니다. 기재부 장관은 코스피 5000 시대 개막에는 AI 대전환이 승부처라 합니다. 재계에서는 생성형 AI가 ‘환멸의 골짜기’를 지나고 있다며, 산업적 성과를 낼 수 있는 AI를 확보한 기업이 주도권을 잡을 것이라 합니다. 에이전틱 AI에 주목해야 한다며 목적 중심의 실행 가능한 AI 서비스를 만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데이터 확보가 핵심으로 이커머스, 제조, 의료 데이터가 대표적이고, 특히 제조 데이터는 AI 학습에 최적화된 자산이라 합니다. 모두 익숙한 주문들입니다.
하지만 결국 문제는 사람입니다. AI 전문가들에게 고액 연봉과 스톡옵션, 실리콘밸리라는 선택지와 거주 허가, 비과세 급여, 최첨단 슈퍼컴퓨터라는 선택지를 주면 대부분 전자를 선택합니다. 2022년에는 AI 연구자 절반 이상이 미국 캘리포니아에 거주하였습니다만 2024년에는 4분의 1만이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영국, 독일, 캐나다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그러나 실리콘밸리는 여전히 AI 전문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곳입니다. 인재들의 진로 전망, 일류 동료, 선구적 연구, 풍부한 자본과 아이디어이 어우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과 유럽, 걸프 지역이 치열하게 인재 유치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만, 실리콘밸리에 미치지 못합니다.
경제 성장과 생산성의 핵심 요소는 기술과 노동과 자본으로 구성됩니다. 이제 기술이 가장 중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인재들은 자신이 일할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최근 천재 중의 천재였다는 카이스트 교수가 중국 대학으로 이직한 사례는 씁쓸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파격적인 연봉과 정년 연장, 실험 지원 등 을 보장하는 중국의 러브콜을 애국심에만 기대어 붙잡아 둘 수는 없습니다. 올해 일본은 생리의학과 화학 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였습니다. 바이오와 화학은 가장 가까운 형제입니다. 지난주 열린 바이오재팬 2025 행사장은 노벨상 수상 소식에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일본은 AI 강국도 조용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위험과 기회가 혼재되어 있습니다. AI와 바이오 산업을 국가 전략산업으로 내세운 건 이번 정부만이 아닙니다. 알만한 주요 대그룹들이 앞다투어 인공지능과 바이오를 미래 먹거리로 내세우고 있는 것을 두고 박수를 쳐야 할 지는 판단이 잘 서질 않습니다. 클러스터, 특히 바이오 클러스터는 지자체들이 앞다투어 조성하였습다만 인재들을 끌어들이기에는 한참 역부족입니다. 산재된 클러스터를 통합과 조정을 통해 판을 뒤엎을 필요도 있습니다. 그나마 민간기업의 최고 AI 전문가가 정책 컨트롤 키를 쥐게 되었다는 것은 다행입니다. 바이오 산업 역시 그런 수준의 컨트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젊은 AI 수석이 (동안이지만 데미스 하사비스나 샘 올트먼에 비하면 한참 올드합니다.) 견고한 관료 시스템과 노회한 정치권과 각자도생의 기업들을 상대하여 제대로 큰일을 벌일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노벨상을 수상한 적 없습니다. 하지만 훗날 노벨상 수상자가 될, 자기 분야에만 몰두해 있는 다국적 천재들을 리드하며 원자탄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는 과학과 예술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사람이었습니다. 10여년 전 AI 바둑으로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던 딥마인드의 데미스 하사비스는 게임에 심취했던 컴퓨터 엔지니어였습니다. 구글이 2014년 딥마인드를 인수할 당시 사람이 전부였던 딥마인드의 가치는 직원 1명 당 100억 원 내외로 ‘저렴’했습니다. 중국의 AI 영웅인 딥시크의 량원평은 조용한 성격의 변방 출신입니다. 이런 괴짜들이 꽃을 피울 때에는 시대를 불문하고 모두 사십대 전후로, 인재들을 리드하고 세상을 흔드는 ‘짜르’라는 게 공통점입니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는 노쇠한 혁명가로 찌질이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밥과 밥의 가족을 쫓는 백인 우월주의자 록조 대령을 대척점으로 두고 드라마가 펼쳐집니다. 그리고 두 사람을 연결하는 십대 소녀가 있습니다. 세 명의 등장 인물 중 가장 강렬한 존재감으로 극도의 긴장감을 자아내는 인물은 단연코 이 소녀입니다. 이 당돌한 십대는 극단의 부모로부터 강점을 물려받은, 이종 융합의 창조물입니다. 과학 저술가 아이작 아시모프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현재 삶의 가장 슬픈 면은 사회가 지혜를 모으는 속도보다 과학이 지식을 얻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것이다.” 지식은 이미 넘칩니다. 이를 집적하여 세상을 바꾸는 힘은 다양한 인재를 가치 있는 목표를 향해 묶어내는 지혜에서 나옵니다. AI와 바이오 융합의 운명도 이와 비슷합니다.
<i>(본 글은 Financial Times의 ‘Why is AI struggling to discover new drugs?’와 하정우·한상기 공저 ‘AI전쟁 2.0’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입니다.)</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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