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 사옥에서 열린 문화예술 강연 프로그램 <아르떼 살롱> 네번째 시간. 연사로 나선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장(62)은 발레의 철학을 공유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문훈숙 단장은 1984년 창설된 유니버설발레단에서 무용수로 활약했고 은퇴 후 지금까지 단장으로서 발레단을 이끌고 있다.

이날 강연에서 그는 발레라는 예술의 의미와 역사, 감상법을 두루 소개했다. 강연장은 높은 집중도와 훈훈한 열기로 가득찼다. 문 단장은 재치있는 일화와 시범으로 좌중의 웃음을 이끌어내 여러 번 박수를 받았다. 머리를 틀어올린 발레 전공생부터 나이 지긋한 신사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객석을 지켰다.
문 단장은 발레가 무대 예술을 넘어 '삶을 변화시키는 예술'임을 강조하면서도 발레의 훈련이 얼마나 혹독한 지 솔직히 털어놨다. "발레는 중노동이에요. 전후반전을 모두 뛰는 축구 선수와 동일한 에너지를 쓰면서도 찡그리는 표정없이 미소지어야 합니다. 무용수들은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한다는 마음으로 자신을 갈고 닦습니다. 그 꾸준함 속에서 구도자의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39세에 무용수 커리어를 접으면서 처음으로 느꼈던 '멈춤의 충격'도 전했다. "발레를 안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몸이) 편하게 사는구나 싶었어요. 그만큼 무용수의 삶은 훈련과 헌신으로 이뤄져 있단걸 깨달았죠." 문 단장은 저명한 현대무용가 마사 그레이엄이 남긴 "무용수는 두 번 죽는다"는 말을 언급하며 무용수의 삶과 은퇴 후의 삶이 전혀 다른 것임을 시사했다. 그러면서 그레이엄의 말에 자신의 해석을 덧붙이며 울림을 전했다. "무용수는 인생을 두 번 산다. 두 배로 축복받은 인생이다."
르네상스 시대 궁궐의 춤에서 현대발레까지
강연의 중반부에서 문 단장은 발레의 기원과 변천사를 인문학적 시선으로 풀어냈다. "발레는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귀족 사회의 사교춤에서 출발했습니다. 이후 프랑스 루이 13세 시대에는 절대 왕정 선전의 수단이 되었고, 태양왕으로 불리던 루이 14세는 직접 무대에 올라 ‘밤의 발레'를 공연했죠. 귀족 사회에서 발레는 필수적으로 익혀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어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와 러시아에 망명한 프랑스 출신의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 20세기 초를 뒤흔든 '발레 뤼스'의 설립자 세르게이 댜길레프 등을 거쳐 발레가 세계인의 예술이 된 과정을 짚었다. 프랑스 시민혁명 이후 러시아는 서구 귀족 문화의 유산을 이어 받으면서 발레의 맥을 이었는데 이탈리아의 장식적인 테크닉과 프랑스의 귀족적인 움직임을 복합해 고전발레의 형식미를 완성했다. 이후 미국의 조지 발란신 등이 이룬 신고전주의 발레와 현대 발레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해 왔다. 문 단장이 직접 고전, 신고전주의 등 시대의 변화에 따른 발레의 동작을 시연하자 객석에서 자연스러운 박수가 터졌다.

움직임을 문장처럼 읽으면 이야기가 보인다
"발레에는 대사가 없지만 마임이라는 몸짓 언어가 있어요. 발레와 친숙해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임을 눈여겨보는 겁니다." 문 단장은 고전발레 '지젤'에서 주인공이 친구들에게 춤을 추자고 권유하는 장면, '라 바야데르'에서 승려가 짝사랑 상대인 무희의 연인을 죽이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을 비롯해 수많은 왕자들이 사랑을 하늘에 맹세하는 장면 등을 몸소 보여줬다. 그는 "무용수들의 상체 움직임은 형용사, 하체 움직임은 동사로 해석하라"며 "움직임을 문장처럼 읽으면 이야기가 보인다"고 덧붙였다.
발레 입문작으로는 '돈키호테'를 추천했다. 마침 오는 18일과 19일 유니버설발레단은 경기도 고양 아람누리 아람극장에서 이 작품을 올릴 예정. "(고전 발레에는) 대체로 슬프게 끝나는 레퍼토리가 많은데, 돈키호테는 유쾌한 희극을 다룹니다. 사전 정보나 지식이 없어도 웃고 즐길 수 있는 작품이라 첫 발레 감상에 제격이지요."
한평생 발레에 헌신한 이유는
한 청중은 문 단장에게 무용수로서 힘들었던 시간을 견디게 한 원동력이 무엇인지 질문했다. "연습실에서 갈고 닦는 시간이 행복했어요. 어제보다 더 나은 나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좋았죠. 그리고 공연의 막이 오르면 나는 사라지고 음악과 공간, 동작만 남는데요. 그 무아의 순간이 빚어내는 희열이 모든 고통을 잊게 해주었습니다."
문단장은 스물셋이던 1986년 유니버설발레단이 창작한 발레 '심청'에서 심청으로 연기했던 과거 사진부터 2011년 오만 무스카트국립극장 개관공연에 유니버설발레단이 마린스키발레단과 아메리칸발레시어터와 동등하게 초청받았던 일, 2023년 수석무용수 강미선의 브누아 드 라당스 수상 등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발레단의 40여년의 역사가 그의 몸에 아로 새겨져있었다.

이날 강연은 발레를 무대 예술의 차원을 넘어선 삶의 철학이자 치유의 언어'로 바라보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한다'는 문 단장의 믿음이 객석에 고요히 내려앉아서였을까. 청중들은 그에게 인사를 전하기 위해 강연 후에도 한참동안 강연장을 떠날 줄 몰랐다.
이해원 기자·사진/최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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