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들어 애플 주가는 1.6% 오르는 데 그쳤다. 메타(67%), 구글(알파벳 41%), 마이크로소프트(36%) 등 다른 빅테크가 올해도 두 자릿수 상승을 이어간 것과 비교하면 초라한 성적표다. ‘AI 경쟁에서 뒤처진 기업’이라는 평가가 주가의 발목을 잡았다. 미국 경제매체 CNBC는 지난 7월 “애플이 월가로부터 AI 전략을 생각해내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애플이 지난 6월 ‘세계개발자회의(WWDC)’에서 이렇다 할 AI 혁신을 보여주지 못한 직후였다. WWDC 직전 시장에서는 애플이 완성된 AI를 들고나올 것이라 기대했지만 애플은 챗GPT를 이용한 이미지 생성 등 외부 AI 활용에 초점을 맞췄다. 이는 애플이 AI 자체 역량을 구축할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에 기름을 부었다.
아이폰17이 공개된 이후에도 AI 혁신의 부재는 여전했다. 지난 9월 아이폰17을 공개하는 자리에서 팀 쿡 CEO는 애플의 AI 기능은 물론 ‘애플 인텔리전스’라는 단어조차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애플이 ‘AI 지각생’임을 각인한 장면은 또 있다. 지난 3월 애플은 한 광고 영상을 공개했다. 영상 속 시리는 일정관리를 척척 하거나 몇 달 전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소비자들은 애플이 곧 아이폰16에 영상처럼 에이전트(비서) 역할을 하는 AI 기능을 탑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실제 공개된 ‘애플 인텔리전스’에는 이런 기능이 없었다. 소비자들은 “거짓 광고”라며 소송을 걸었고 애플은 결국 광고를 내렸다.
내부에서는 애플이 노키아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내부 테스트 결과 애플은 자사 AI 모델이 오픈AI의 챗GPT 등에 비해 2년 이상 뒤처졌다고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iOS는 애플의 가장 큰 강점으로 꼽혔다. 완벽한 보안과 일관된 사용자 경험을 구축하는 것이 애플의 철학이었다. 아이폰·아이패드·애플워치·맥북으로 이어지는 하드웨어와 이를 연결하는 소프트웨어, 앱스토어 기반의 다양한 서비스가 애플 비즈니스의 핵심축이었다. 하지만 막대한 투자와 빠른 실행이 필수인 AI 시대가 도래하면서 완벽주의와 폐쇄주의는 애플에 독이 됐다.
애플이 AI 관련 비판을 받을 때마다 팀 쿡을 비롯한 C레벨급 임원들은 같은 맥락의 변명을 내놨다. “우리는 최초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아이폰 출시 이후 속도보다 품질을 중요시하며 “완벽하지 않으면 시장에 내놓지 않는다”는 애플의 철학을 이어가고 있다는 의미다.
월스트리트저널(WSJ) 에 따르면 애플은 일찍이 시리를 개선하고 자사 제품군에 AI 기술을 도입하려 했다. 하지만 AI 개발 과정에서 강박적으로 사용자 보안 및 완벽주의에 매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페드로 도밍고스 워싱턴대 컴퓨터과학·공학 명예교수는 WSJ에 “AI에 100% 정확도란 없다”며 “애플의 방식은 이러한 현실과 양립할 수 없다. 그들은 무엇이든 완벽하다고 느끼기 전에는 출시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스티브 잡스의 마지막 유산이었던 ‘시리’를 선보였을 때만 해도 애플은 AI 생태계를 선도하는 듯했다. 애플은 2010년 ‘시리’를 인수하며 음성비서라는 개념을 스마트폰에 처음 도입했다. 하지만 2022년 말 챗GPT가 출시되면서 AI 판이 뒤집어졌다.
당시 애플도 소규모 팀을 꾸려 챗GPT에 대항할 제품을 개발해왔다. 애플은 초기 AI 기술을 충분히 발전시킬 수 있었지만 번번이 기회를 놓쳤다. 애플은 2018년 구글에서 AI 책임자였던 존 지안안드레아를 AI 총괄로 영입했다. 하지만 그는 폐쇄적인 애플 문화에 적응하지 못했고 몇몇 부서로부터 반감을 산 것으로 알려졌다. 애플의 AI 혁신에도 진전이 없었다. 결국 지난 3월 존 지안안드레아는 시리와 로봇 프로젝트의 권한을 박탈당했고 이는 하드웨어 부문으로 이관됐다. 그의 손에 남은 건 ‘애플 인텔리전스’뿐이었다.
경영진 간 의견도 갈렸다. 애플의 소프트웨어 책임자인 크레이그 페더리기 부사장은 AI에 대규모 투자를 하는 데 주저한 것으로 알려졌다. 블룸버그는 “페더리기 부사장이 AI를 컴퓨터나 모바일 기기의 핵심 역량으로 보지 않았으며 아이폰·맥·아이패드 운영체제의 연례 업데이트 개발에 투입되는 인력과 자원을 빼앗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그 결과 애플은 경쟁사보다 AI 인력도 적고 GPU(그래픽처리장치) 확보에도 늦었다.
구글 모회사 알파벳은 올해 AI 투자를 비롯한 CAPEX를 850억 달러로 올려 잡았다. 구글은 자사의 어시스턴트인 제미나이와 AI 연구도구인 노트북LM을 선보이며 오픈AI가 장악했던 생성형 AI 시장에 균열을 내고 있다. 제미나이를 안드로이드에 적극적으로 통합하며 운영체제(OS)부터 사용자경험에 이르기까지 애플보다 먼저 우위를 점했다.
오픈AI는 올해 초부터 오라클, 일본 소프트뱅크와 함께 미국에서 4년간 5000억 달러를 투입하는 초대형 AI 인프라 구축 사업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오픈AI가 엔비디아, AMD, 오라클 등과 계약하면서 AI 인프라 조달 약정 규모가 1조 달러에 육박했다. 반면 3~6월(회계연도 3분기) 애플의 CAPEX는 34억6000만 달러에 그쳤다. 지난해 같은 기간(21억5000만 달러)보다 증가했지만 다른 빅테크 대비 턱없이 적은 숫자다.
투자에 인색한 애플이 통 크게 베팅하는 경우도 있다. 애플은 올해 2분기 1000억 달러 규모의 자사주 매입을 발표했다. 자사주 매입은 별다른 호재 없이도 주가 가치를 높이기 때문에 기존 주주에게는 의미 있는 정책이다. 하지만 경쟁 기업들은 AI 데이터센터, R&D, 신규 인프라에 막대한 자본을 투입하면서 주주환원(주식 환매) 규모는 오히려 정체 또는 감소 추세다. 미국 내에서 애플이 혁신보다 주가 올리기에만 집중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AI 경쟁력을 단기간에 높이기 위한 M&A도 없었다. 애플은 2014년 헤드폰 제조업체 비츠(Beats)를 30억 달러(약 4조원)에 인수한 이후 대규모 M&A를 진행하지 않았다. 한때 퍼플렉시티 인수설이 돌았지만 애플은 끝내 퍼플렉시티를 인수하지 않았다. 오픈AI 초기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며 단숨에 AI 경쟁력을 확보한 MS나 2014년 영국 스타트업이었던 딥마인드를 인수한 구글과는 정반대의 행보였다.
애플의 AI 정책이 불확실해지면서 올해 A급 인재들도 속속 이탈했다. 최근 애플 AI 임원인 로비 워커 시니어 디렉터를 비롯한 10여 명의 애플 핵심 엔지니어들이 줄줄이 퇴사를 결정했다. 애플에서 AI 모델 개발을 총괄했던 뤄밍 팡은 메타가 2억 달러(약 2800억원)에 달하는 보상 패키지를 제시하자 팀을 떠났다. 뤄밍 팡과 함께 일하던 애플 출신 AI 연구원 마크 리와 톰 건터 역시 메타 ‘초지능연구소’로 이직했다. 애플의 AI 주축 멤버들이 메타나 다른 빅테크로 줄줄이 빠져나가면서 애플의 기술 리더십 공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애플의 AI 전략이 경쟁사에 뒤처지면서 ‘제품 중심 CEO’로의 교체를 고려할 때라는 의견까지 나왔다. 결국 오는 11월 65세가 되는 팀 쿡의 사임설이 불거졌다. 블룸버그는 “애플 내부에서 장기적인 리더십 전환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팀 쿡의 가장 유력한 후보자로 꼽히는 이는 애플의 하드웨어 엔지니어링 부사장 존 터너스다. 블룸버그통신은 “애플 이사회는 증강현실(AR), 생성형 AI, 자율주행자동차 등에서 고전한 상황에서 터너스 같은 엔지니어링 지도자가 해답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공급망 관리와 생태계 확장으로 애플을 시가총액 3조 달러 기업으로 키워낸 팀 쿡이 무대에서 내려가는 것이다.
이 밖에 일부 전문가들은 애플이 중국 시장에 과도하게 의존한 것이 애플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지적도 하고 있다. 팀 쿡 체제에서 애플의 중국 의존도는 절대적 수준으로 높아졌다. 제품 제조는 물론 시장 의존도도 높아졌다. 이 과정에서 중국에 기술과 노하우가 이전됐다는 지적이 미국 내에서 꾸준히 나오고 있다. 이 같은 지정학적 리스크가 애플에 장기적으로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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