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햇살이 안데스 능선을 넘어 포도밭을 비추면 잔 속 보랏빛이 먼저 깨어난다. 단단한 과실 향이 잔 끝에서 피어오르고, 공기엔 먼 산의 미네랄 향이 스민다. 포도밭이 끝없이 이어진 이곳, 아르헨티나 북서부 도시 멘도사는 오랜 세월 ‘말베크의 고향’으로 불려왔다. 안데스의 눈 녹은 물과 강렬한 햇살이 만든 이 땅의 와인은 남미의 열정과 정직한 노동의 시간으로 빚어진다. 이런 멘도사에 세계의 시선이 모였다. 지난 6~9일, ‘빈엑스포 익스플로러 멘도사 2025’가 열리면서다. 화려한 박람회 대신 생산자와 바이어가 직접 마주 앉아 와인의 결을 확인하는 밀도 높은 현장이었다.
행사장은 멘도사 시내의 옛 양조장을 개조한 ‘에스파시오 아리수’. 이곳에서 나흘 동안 20여 개국 150여 개 와이너리에서 온 80여 명의 바이어가 만나 1100건이 넘는 비즈니스 미팅을 했다. 주정부와 수출진흥기관 프로멘도사가 손잡고 만든 이번 무대는 와인의 본고장을 넘어 글로벌 시장으로 향하려는 멘도사의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특히 카테나 자파타, 수카르디, 트라피체 등 국내에도 잘 알려진 아르헨티나 대표 와이너리뿐 아니라 아직 해외 시장에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소규모 와이너리가 자신들을 빛내줄 수입 파트너를 찾고 있었다. 그들의 와인은 양보다 개성을 앞세우고, 생산량은 적지만 품질은 섬세했다. 행사장은 ‘남미 와인의 다양성’이 한자리에 펼쳐진 생생한 지도 같았다.
이곳의 대표 품종은 단연 말베크다. 원래 프랑스 남부 카오르 지방의 포도였던 말베크는 아르헨티나의 토양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안데스의 강렬한 햇살과 큰 일교차가 빚어낸 말베크는 짙은 색, 풍부한 과실 향, 부드러운 타닌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한국에서도 말베크는 ‘입문자를 위한 레드 와인’으로 통한다. 중후하면서도 부드러운 질감이 한우, 삼겹살, 제육볶음 등 고기 요리와 훌륭한 궁합을 이룬다. 오크의 묵직한 풍미보다 과실 중심의 균형 잡힌 맛 덕에 ‘쉽게 마실 수 있으면서도 만족감이 높은 레드’로 꼽힌다. 실제로 여러 와인 전문가는 “말베크만큼 한국인의 입맛과 음식 문화에 잘 맞는 와인도 드물다”고 말한다.
하지만 멘도사의 시선은 이미 다음 단계를 향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와인의 무게중심이 조금씩 옮겨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새 화이트와 스파클링 와인의 성장세가 두드러진다. 낮은 알코올, 신선한 산도, 가벼운 마무리…. 이른바 ‘프레시’한 와인이 새로운 세대를 사로잡았다. 계절과 음식의 제약 없이 즐길 수 있고, 하루 한 잔을 부담 없이 곁들일 수 있다는 점이 인기 요인이다.
레드 와인 안에서도 변화의 흐름은 있다. 묵직한 오크풍의 전통적인 풀보디 대신 한결 밝고 산뜻한 질감의 와인이 주목받고 있다. 피노누아, 가메, 쿨 클라이밋(서늘한 기후)의 카베르네 프랑, 고지대(高地帶) 말베크 등이 대표적이다. 과실의 생동감과 산미가 살아 있는 레드는 해산물이나 가벼운 육류 요리에도 잘 어울려 음식의 폭을 넓혀준다. 세계 주요 와인 산지들이 ‘프레시함’과 ‘투명한 질감’을 앞세우는 것도 이 같은 소비 흐름의 반영이다.
멘도사 역시 예외가 아니다. 기존의 묵직한 스타일을 고집하기보다 고도 1200m 안팎의 우코밸리처럼 일교차가 큰 지역에서 신선한 산도와 미네랄을 살린 와인으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제는 힘보다 균형이, 농밀함보다 개성이 중요하다.” 현지 양조가들의 말처럼, 멘도사는 전통의 색을 지키면서도 ‘말베크 이후의 멘도사’를 모색하고 있다.
이번 행사는 그런 변화의 현장을 그대로 보여줬다. 포도밭 한가운데에서 테이스팅이 열리고, 시음을 겸한 즉석 미팅에서 바이어들은 주문량과 가격을 논의했다. “좋은 와인을 만드는 법보다 어디서, 어떻게 팔릴지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현지 와이너리 관계자의 말처럼, 생산과 시장이 한 호흡으로 맞닿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멘도사의 와인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강렬한 태양과 안데스의 바람이 만든 특유의 깊이, 남미 고유의 정열이 깃든 향과 질감, 그리고 사람들의 온기가 있다. 빈엑스포 익스플로러가 보여준 건 비즈니스의 장이 아니라 ‘와인 문화의 확장’이었다. 세계 와인 시장이 가벼움과 신선함으로 이동하는 이 시점에도 멘도사의 와인은 여전히 자신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강렬함 속의 부드러움’, 그것이 멘도사의 와인이 지닌 힘이었다.
멘도사=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
남미에서 처음 열린 와인 엑스포
‘빈엑스포(Vinexpo)’는 독일의 ‘프로바인(ProWein)’, 이탈리아의 ‘비니탈리(Vinitaly)’와 함께 세계 와인업계에서 손꼽히는 국제 행사다. 남미 대륙에서 처음 열리는 빈엑스포의 개최지가 멘도사라는 것은 이 지역이 ‘남반구의 와인 수도’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행사장은 멘도사 시내의 옛 양조장을 개조한 ‘에스파시오 아리수’. 이곳에서 나흘 동안 20여 개국 150여 개 와이너리에서 온 80여 명의 바이어가 만나 1100건이 넘는 비즈니스 미팅을 했다. 주정부와 수출진흥기관 프로멘도사가 손잡고 만든 이번 무대는 와인의 본고장을 넘어 글로벌 시장으로 향하려는 멘도사의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특히 카테나 자파타, 수카르디, 트라피체 등 국내에도 잘 알려진 아르헨티나 대표 와이너리뿐 아니라 아직 해외 시장에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소규모 와이너리가 자신들을 빛내줄 수입 파트너를 찾고 있었다. 그들의 와인은 양보다 개성을 앞세우고, 생산량은 적지만 품질은 섬세했다. 행사장은 ‘남미 와인의 다양성’이 한자리에 펼쳐진 생생한 지도 같았다.
안데스의 햇살이 빚어낸 와인의 땅
멘도사는 아르헨티나 와인의 심장부이자 남미 최대의 포도 재배지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서쪽으로 약 1000㎞ 떨어진 해발 700~1500m 고도에 자리해 있다. 안데스의 눈 녹은 물이 관개수로 흘러들고, 건조한 대륙성 기후와 큰 일교차가 포도의 당도와 산도를 조화롭게 만든다. 연중 맑은 날이 300일이 넘는 ‘햇빛의 땅’이지만, 해발이 높아 열이 과하지 않다. 이런 조건 덕분에 멘도사는 전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고도 와인 산지’로 불린다.이곳의 대표 품종은 단연 말베크다. 원래 프랑스 남부 카오르 지방의 포도였던 말베크는 아르헨티나의 토양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안데스의 강렬한 햇살과 큰 일교차가 빚어낸 말베크는 짙은 색, 풍부한 과실 향, 부드러운 타닌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한국에서도 말베크는 ‘입문자를 위한 레드 와인’으로 통한다. 중후하면서도 부드러운 질감이 한우, 삼겹살, 제육볶음 등 고기 요리와 훌륭한 궁합을 이룬다. 오크의 묵직한 풍미보다 과실 중심의 균형 잡힌 맛 덕에 ‘쉽게 마실 수 있으면서도 만족감이 높은 레드’로 꼽힌다. 실제로 여러 와인 전문가는 “말베크만큼 한국인의 입맛과 음식 문화에 잘 맞는 와인도 드물다”고 말한다.
가벼움의 시대, 와인도 달라진다
하지만 멘도사의 시선은 이미 다음 단계를 향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와인의 무게중심이 조금씩 옮겨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새 화이트와 스파클링 와인의 성장세가 두드러진다. 낮은 알코올, 신선한 산도, 가벼운 마무리…. 이른바 ‘프레시’한 와인이 새로운 세대를 사로잡았다. 계절과 음식의 제약 없이 즐길 수 있고, 하루 한 잔을 부담 없이 곁들일 수 있다는 점이 인기 요인이다.레드 와인 안에서도 변화의 흐름은 있다. 묵직한 오크풍의 전통적인 풀보디 대신 한결 밝고 산뜻한 질감의 와인이 주목받고 있다. 피노누아, 가메, 쿨 클라이밋(서늘한 기후)의 카베르네 프랑, 고지대(高地帶) 말베크 등이 대표적이다. 과실의 생동감과 산미가 살아 있는 레드는 해산물이나 가벼운 육류 요리에도 잘 어울려 음식의 폭을 넓혀준다. 세계 주요 와인 산지들이 ‘프레시함’과 ‘투명한 질감’을 앞세우는 것도 이 같은 소비 흐름의 반영이다.
멘도사 역시 예외가 아니다. 기존의 묵직한 스타일을 고집하기보다 고도 1200m 안팎의 우코밸리처럼 일교차가 큰 지역에서 신선한 산도와 미네랄을 살린 와인으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제는 힘보다 균형이, 농밀함보다 개성이 중요하다.” 현지 양조가들의 말처럼, 멘도사는 전통의 색을 지키면서도 ‘말베크 이후의 멘도사’를 모색하고 있다.
이번 행사는 그런 변화의 현장을 그대로 보여줬다. 포도밭 한가운데에서 테이스팅이 열리고, 시음을 겸한 즉석 미팅에서 바이어들은 주문량과 가격을 논의했다. “좋은 와인을 만드는 법보다 어디서, 어떻게 팔릴지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현지 와이너리 관계자의 말처럼, 생산과 시장이 한 호흡으로 맞닿는 순간이었다.
토론테스, 멘도사의 미래 열 수 있을까
다만 한국 시장의 문턱은 여전히 높다. 와인 소비가 빠르게 늘었지만, 수입사 입장에서 아르헨티나산 와인을 들여오기엔 고민이 따른다. 한민석 나라셀라 브랜드전략2팀장은 “아르헨티나는 말베크를 제외하면 와인 인지도가 높지 않기 때문에 한국 시장에서 성공하려면 각 와이너리가 자신만의 확실한 개성과 강점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명용진 이마트 주류팀장은 “한국에선 요즘 화이트와 스파클링이 대세인데, 멘도사는 여전히 레드 중심이어서 시장 진입이 쉽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르헨티나가 화이트에선 약한 편이지만 향후 토착 품종인 토론테스가 주목받을 가능성이 있다”며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을 잇는 차세대 화이트가 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그럼에도 멘도사의 와인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강렬한 태양과 안데스의 바람이 만든 특유의 깊이, 남미 고유의 정열이 깃든 향과 질감, 그리고 사람들의 온기가 있다. 빈엑스포 익스플로러가 보여준 건 비즈니스의 장이 아니라 ‘와인 문화의 확장’이었다. 세계 와인 시장이 가벼움과 신선함으로 이동하는 이 시점에도 멘도사의 와인은 여전히 자신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강렬함 속의 부드러움’, 그것이 멘도사의 와인이 지닌 힘이었다.
멘도사=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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