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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여왕과 광고맨의 거래

1917년 미국에서 있었던 'Wood v. Lucy, Lady Duff?Gorden' 사건은 '묵시적 약속(implied promise)'의 존재를 인정한 영미계약법의 고전으로 꼽힌다. 당시 뉴욕 패션계의 아이콘이었던 '레이디 더프-고든(Lady Duff-Gordon)'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명성과 영향력을 가진 디자이너였다. 그녀의 이름과 디자인은 곧 브랜드였고, 이를 활용할 권리는 상당히 가치 있는 자산이었다.
레이디 더프-고든은 자신의 이름을 활용한 상품의 독점 판매권을 광고 사업가 켈빈 우드(Kevin Wood)에게 부여했다. 다만 계약서엔 "우드가 직접 상품의 판매나 마케팅해야 한다"는 등의 구체적인 의무 사항을 명시하지 않았다. 이를 근거로 그녀는 독점 계약을 맺었음에도 우드를 거치지 않은 채 다른 회사들과 독자적으로 직접 거래하며 수익을 챙겼다. 그러자 우드는 계약 위반을 주장하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사건의 핵심 쟁점은 계약서상 우드에게 아무런 의무를 규정하지 않은 경우에도 독점 계약의 법적 구속력이 있는지였다. 이 사건은 계약서에 명시적 약속이 없더라도 그 상황과 문맥 속에서 당사자의 의무가 묵시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획기적인 판단으로 이어졌다.
계약서에 없는 '대가관계'라니?
계약이 성립하려면 당사자 간에 '대가관계(consideration)'가 존재해야 한다. 위 사건의 계약서엔 우드의 독점권에 대해 “The exclusive right to place endorsements and market Lady Duff-Gordon’s designs.”로만 규정돼 있었다. 우드가 권리 보유자로서 정확히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의 업무나 활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별도 조항이 없었던 것이다. 계약서만 놓고 보면 레이디 더프-고든은 우드에게 독점권을 줬지만, 우드에게 특별한 의무가 부과되지 않은 경우에도 대가관계가 인정될 것인지 문제 된다.
겉으로 보면 '일방적인 약속'처럼 보일 수 있었다. 레이디 더프-고든은 우드에게 "당신이 내게 무엇을 하겠다고 약속한 게 없으니, 내가 당신한테 줄 것도 없다"며 계약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이 같은 레이디 더프-고든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우드가 가진 독점적 계약의 유효성을 인정했다. 계약서에 명시적인 문구가 없더라도, 거래의 맥락과 당사자의 합리적 기대를 고려해 대가관계의 존재 여부를 다퉈 보면 계약을 취소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즉, 계약서에 적힌 문구 자체보다 당사자의 상호 이해와 행위의 의도 등 실질적 맥락을 중시해, "우드가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레이디 더프-고든은 이익을 얻을 수 없고, 이에 따라 계약의 목적은 달성될 수 없으므로 독점권을 부여받은 이상, 우드는 그 권리를 활용해 디자인을 홍보하고 수익을 창출할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묵시적 약속(implied promise)을 부담하므로 계약이 무효라 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Wood v. Lucy, Lady Duff?Gorden, 118 N.E. 214, 218 (N.Y. 1917)).
묵시적으로 인정되는 '최선의 노력 의무'
법원은 이 사건을 통해 계약에 '내재된' 조건을 분명히 했다. 우드의 보수는 그의 노력에 달려 있었고, 레이디 더프-고든의 권리는 우드의 독점권에 의해 제한되므로, 우드에겐 '최선의 노력의무(duty of best efforts)'가 따라온다는 법리다. 독점권이 주어진 당사자에게 계약상 구체적인 의무가 명시돼 있지 않더라도, 거래의 사정에 비춰 보면 그 독점 판매나 사용권과 관련한 업무를 수행함에 최선의 노력을 다할 의무가 있다고 할 수 있으므로, 묵시적 약속에 의한 대가관계가 인정될 수 있다는 얘기다.계약에는 글로 적힌 내용뿐 아니라 당사자 간 상호 신뢰와 기대도 반영된다. 독점권에 단순 권리만 내재된 게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책임과 노력이 뒤따르는 이유다. 이는 오늘날 계약법에서 인정하는 신의성실의 원칙이나 묵시적 조건의 기초가 됐다. 흔히 말하는 "신뢰를 깨뜨렸다", "기본도 안 지켰다"는 등의 상황이 법적으로도 반영될 수 있는 것이다.

계약 당사자 간 신뢰 보장 위한 장치
Wood v. Lucy, Lady Duff?Gorden 사건은 거래 구조상 독점권을 받았다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과 노력이 따라온다는 상호 기대가 묵시적으로 살아 움직인다는 계약의 균형과 신뢰 보호라는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계약은 계약서에 적힌 권리와 의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누가, 무엇을 했고, 어떤 기대 속에서, 어떤 이익을 나누기로 했는지 살펴본 뒤 계약 당사자 간 서로에 대한 신뢰와 기대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 또한 계약법의 역할이라 할 수 있다.이 판례의 원칙은 비단 패션 업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늘날 독점적 거래 계약, 인플루언서 전속 광고 계약, 스타트업 투자 계약 등 다양한 종류의 독점적 거래나 협업 계약은 당사자 간 계약 이행 과정에서 공정한 기대와 신의성실을 필요로 하고, 독점적 권리를 가진 당사자에게 최선의 노력을 요구하는 조건을 내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부동산 거래 계약에서 구매자가 담보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경우에만 매수한다는 조건이 있다면, 매수인은 은행과 상담하고 서류를 준비하는 등 합리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계약상 의무를 자동으로 부여받게 된다. 특정 브랜드가 한 인플루언서와만 독점 협업하기로 계약했는데 그 인플루언서가 다른 유사 브랜드를 몰래 홍보한다면, 계약서에 명시적 조항이 없었더라도 묵시적 의무 위반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또 다른 레이디 더프-고든과 우드가 서로에게 "우리 계약서엔 안 쓰여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었나요?"라고 말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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