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년 전 신라 최고위층의 젊은 장군이 세상을 떠났다. 장군 곁에 있던 시종은 사후세계에서도 주인을 모시기 위해 죽어야 했다. 시종 자리는 무덤의 껴묻거리 칸(부장품을 묻는 칸), 주인 갑옷과 말 갑옷 사이 똑바로 누울 수도 없는 비좁은 공간이었다.
국가유산청은 20일 경주 황남동의 ‘경주 황남동 1호 목곽묘’ 유적 앞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발굴 성과를 공개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건 신라시대 순장된 인물의 뼈다. 5세기 이전 신라시대에 순장 풍습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 순장자 뼈를 확인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껴묻거리 칸에서는 순장자 인골이 함께 나왔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에는 원래 순장 풍습이 있었지만 지증왕(재위 500~514년) 때 금지했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실제 인골이 나온 적은 없었다. 뼈가 모두 삭아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 무덤 주인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순장자는 말 갑옷 위에 묻혔기 때문에 산화된 철과 뼈가 결합하면서 인골이 남을 수 있었다. 다만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성별, 사망 시 나이 등은 제대로 추정할 수 없었다.
순장자의 자세와 묻힌 양식이 특이하다. 대각선으로 누워 팔을 벌리고 다리도 ‘O’자 형태로 벌어져 있다. 김헌석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학예연구사는 “똑바로 누워 묻히기에는 공간이 부족해 이 같은 자세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며 “순장 자체는 예정돼 있었지만 어디에 어떻게 묻을지는 뒤늦게 정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공간이 부족해 순장자 몸을 껴묻거리 사이에 밀어 넣었다는 얘기다.
유물 중에서는 금동으로 만든 판 조각을 주목할 만하다. 모관(상투에 씌우는 작은 고깔모자 모양 관) 일부인 것으로 추정된다. 김재열 국가유산진흥원 팀장은 “이번에 나온 관은 지금까지 경주에서 발견된 신라 금동관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말 갑옷은 신라 고분에서는 두 번째로 발견된 것이다. 국가유산청은 “당대 중장기병 모습을 드러내는 중요한 유물”이라고 했다.

신라인이 기존 무덤이 있는 자리 위에 또 무덤을 만든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심현철 계명대 사학과 교수는 “지금 우리가 보는 신라시대 무덤은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까지 모습일 뿐 아래에는 그전에 만들어진 수없이 많은 무덤이 있다고 봐야 한다”며 “발굴 조사와 학계 논의가 이뤄져야 이유를 추측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가유산청은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을 맞아 이번에 발굴한 유물 일체(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신라월성연구센터)와 황남동 1호 목곽묘 발굴 현장(경주시 황남동 390-1)을 공개할 예정이다. 공개 기간은 오는 27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다.
이와 함께 국가유산청과 경주시는 다음달 1일까지 신라 천문학 상징물인 첨성대에서 우리 천문학의 역사와 신라 문화 이미지 등 선보이는 야간 외벽 영상(미디어 파사드)을 상영한다. 신라 왕경 주요 유적인 ‘경주 구황동 원지 유적’도 같은 날까지 야간 경관 조명을 설치한 ‘빛의 정원’으로 바뀐다. 원지 유적은 7~8세기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공 연못, 인공 섬 등으로 이뤄져 있다. 오후 6시부터 11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경주=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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