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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바다, 고래처럼 누비다…법무법인 태평양의 도전 [로펌의 역사]

입력 2026-01-06 12:00   수정 2026-01-06 13:55




청명한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청록색 로고, 회의실을 가득 채운 밍크고래 사진. 법무법인 태평양은 창립자 김인섭 명예대표변호사가 '태평양을 건너 세계를 누비는 고래들'을 떠올리며 만든 로펌이다. 한국에서 출발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길 바란다는 염원이 담겼다.

지난달 창립 45주년을 맞은 태평양은 국내 최상위 로펌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2024년 태평양은 국세청 부가가치세 신고 기준 연매출 3918억원을 기록해 국내 3위에 올랐다. 2025년에는 두자릿수의 역대급 성장률을 기록하며 재도약의 기반을 닦았다. 이 로펌은 해외 진출에도 힘쓴 결과 국내 법무법인 최초로 국내외 합산 연매출 3000억원(2018년)과 4000억원(2023년)을 돌파했다. 이름처럼 회사 역사 내내 끝없는 도전을 이어온 결과다.




도원결의로 시작된 '한국형 로펌'
태평양의 시작은 1980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판사 출신 김인섭 대표변호사가 서울민사지방법원 부장판사를 끝으로 법복을 벗고 '김인섭 법률사무소'를 열면서다. 6년 뒤인 1986년, 후배들과 함께 '태평양 합동법률사무소'로 확대 개편했다. 법무부 장관 출신 배명인, 검사 출신 이정훈 변호사가 설립자로 합류했다.

태평양의 영문명 'BKL(Bae, Kim & Lee)'도 이때 만들어졌다. 창업자들의 성을 따 영미식 명명 방식을 따른 것이다. 1987년 법무법인으로 정식 전환했고, 1995년 지금의 '법무법인 태평양'으로 명칭을 바꿨다. 이 시기 강종구, 김갑유, 서동우, 오용석, 오양호 등 기업법무 분야를 이끌 주요 변호사들이 잇달아 합류했다.



태평양은 출범 초기부터 줄곧 '한국형 로펌'을 표방했다. 김앤장 법률사무소, 법무법인 세종 등 다른 대형 로펌 대표들이 해외 학위와 영미권 로펌 경력을 바탕으로 시장에 진입한 것과 달리, 김인섭 대표는 국내 법학 교육과 실무 경험만으로 로펌을 세웠다. 법무법인 광장(한미합동법률사무소와 합병), 율촌(김앤장에서 분리 독립)처럼 인수·분할 없이 현재까지 독립 로펌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도 국내 로펌사에서 보기 드문 사례다.

설립 초기 송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태평양은 고도성장기에 접어든 국내 기업을 주요 고객으로 삼았다. 특히 1990년대 IMF 사태 이후 대규모 기업 구조조정에 뛰어들며 외형을 키웠다. 송무 편의성을 위해 1998년 본사를 서울 서소문에서 서초동 인근 테헤란로로 이전했다. 기아자동차의 파산 처리, 대우그룹 계열사의 워크아웃 등에도 관여하며 기업회생과 인수합병(M&A) 역량을 키웠다.
세계화가 불러온 분쟁의 바람
IMF 후유증이 이어지던 2000년대, 태평양은 국제 분야에 본격 진출했다. 김갑유 변호사(현 법무법인 피터앤김 대표)가 주도해 2002년 국내 로펌 최초로 국제중재팀을 꾸렸다. 해외 자본의 국내 진출과 수출 중심 산업 구조에 따른 해외 분쟁 수요 증가를 선제적으로 대응한 것이다. 2004년에는 중국 베이징에 국내 로펌 최초로 해외 사무소를 열었다.

성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2009년 현대 측을 대리해, 1999년 아부다비국영석유투자회사에 넘어갔던 현대오일뱅크의 경영권을 국제상업회의소(ICC) 중재를 통해 되찾았다. 2012년에는 미국 헤지펀드 론스타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6조원대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에서 한국을 대리했다. 13년간 이어진 이 분쟁에서 2022년 1심 판정(4.6% 인정)과 지난 11월 1심 취소 결정까지 이끌며 한국 측 승리를 이끌었다.



태평양은 경영권 분쟁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모나코 자산운용사 소버린과 SK그룹의 경영권 분쟁에서 SK를 대리하면서다. 소버린의 주주행동주의 공격은 국내 재계에 충격을 줬다. 소버린은 2004년 임시 주주총회 소집을 요구하며 최태원 회장을 이사회에서 몰아내려 했지만, 이사회가 부결하자 법원에 임시주총 소집 허가를 청구했다. 태평양은 법원의 기각 결정을 이끌어냈고, 분쟁은 SK의 승리로 끝났다.

태평양도 이 시기 거버넌스를 정비하고 본격적인 대형화를 추진했다. 기업들이 점점 더 대형화하고 전문화되면서 법무 수요 역시 크게 늘었다. 태평양은 2007년 7월, 주요 대형 로펌 중 처음으로 '유한책임' 법무법인으로 전환했다. 구성원 변호사 과반의 합의만으로 의사결정이 가능한 구조로, 신속한 경영 결정을 위한 조치였다.
뒤집힌 기업법무 판도, 전문성에 '고삐'
2000년대 후반부터는 국내외 투자은행(IB), 사모펀드(PEF) 중심의 M&A가 활발해지면서 태평양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2009년 미국계 PEF KKR이 OB맥주를 18억달러(약 2조원)에 인수할 때 KKR의 법률 자문을 맡았다. 2015년 테스코가 홈플러스를 MBK파트너스에 7조2000억원에 매각할 때는 테스코 측을 자문했다. 당시 기준으로 국내 최대 규모 M&A였다.

특히 2010년대 들어 태평양은 전문성 강화에 집중했다. 카카오·네이버 등 IT 기업의 부상, 적대적 M&A와 행동주의 빈도 증가 등으로 법적 쟁점이 정교해졌기 때문이다. 태평양은 M&A와 경영권 분쟁 변호사를 모아 2012년 메이저 로펌 중 처음으로 '경영권 분쟁팀'을 신설했다. 2018년에는 스타트업이 몰리는 판교에 사무소를 개소했다.



빠르게 성장한 분야는 노동이었다. 노동조합의 기업 압박이 본격화되고,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로 '통상임금'의 요건이 구체화되면서 노동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높아지던 시기다. 2014년 영입된 이욱래 변호사를 중심으로 노동 부문을 확장해 선도적인 쟁점에서 굵직한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을 이끌어냈다. 2018년 '발레오전장' 사건에선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산별노조 산하 지부·지회의 개별 노조 전환 가능성을 처음으로 인정받았다.

강점을 보여왔던 송무 역량도 입증해냈다. 한국 기업사에 길이 남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제일모직-삼성물산 부당합병 사건에서 이 회장을 대리하면서다. 권순익·이재욱 태평양 변호사는 김앤장과 함께 이 회장이 기소된 직후인 2020년부터 1심을 맡아 2024년 2월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작년 2월 항소심에서도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이끌어내며 사실심 단계에서 승부를 결정지었다. 이 회장은 7월 대법원 상고기각 판결로 모든 혐의를 벗었다.
'우영우' 등장한 그 로펌... 진짜 고래가 됐다
2020년대 들어 태평양은 물리적 쇄신에 돌입했다. 강남 이전 22년 만인 2020년 3월, 테헤란로 본사를 서울 광화문 센트로폴리스로 옮겨 사대문 안에 집중된 국내외 주요 대기업·정부 수요를 겨냥했다. 이준기 당시 업무집행변호사(현 대표변호사) 주도로 사진작가 브라이언 오스틴의 대형 밍크고래 사진(1.8m×9.1m)을 축소해 26층 대회의실에 걸었다.

2022년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등장한 로펌 '한바다'의 모티브가 돼 대중적 인지도도 높아졌다. 자폐 스펙트럼을 지닌 주인공 우영우가 애착을 보이는 고래는 태평양에서 착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태평양의 프로보노(무료 법률 지원) 활동도 재조명됐다. 국내 로펌 최초로 2002년 공익활동위원회를 세우고, 2009년엔 재단법인 동천을 설립했다. 프로보노 시간만 2009년 6933시간에서 2024년 2만8672시간으로 네 배 가까이 뛰었다. 국내 로펌 중 2만시간을 돌파한 것도 태평양이 처음이다.



인재 영입도 적극적으로 이어졌다. 작년에는 세계 3위권 영국계 로펌 앨런앤오버리(A&O)에서 23년간 근무한 파트너 출신 크리스 테일러 변호사를 영입했다. 국내 로펌이 해외 대형로펌 파트너를 영입한 것도 사실상 처음이었다. 태평양의 변호사 수는 2024년 12월 기준 558명으로, 10년 전인 2015년 369명에서 51%나 늘었다.

국내 대형로펌 간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는 가운데, 로펌업계는 태평양의 다음 행보에 주목하고 있다. 매출과 변호사 수 같은 양적 성장 지표를 넘어선 도약을 보여줄지가 관심사다. 새롭게 쓰일 태평양의 역사에 지금의 구성원들이 어떤 답을 내놓을지가 관건이다. 태평양 관계자는 "후발주자로 시작했지만, '프론티어 정신'을 내내 강조해온 로펌"이라고 강조했다.

박시온 기자 ushire90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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