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토론토국제영화제의 경쟁부문에서 프리미어로 상영된 <세계의 주인>은 <우리들> (2016)로 한국독립영화의 주요 작가감독으로 부상한 윤가은 감독의 신작이다. 영화는 한없이 밝고 장난기 많은 여고생, 이주인(서수빈)의 은밀한 일상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녀의 은밀한 일상이라면 다름 아닌 연애다. 그는 또래 친구와 열렬한 연애 중이며 학교의 빈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한 낮의 키스는 남자친구와 할 수 있는 가장 짜릿한 일이다. 물론 일탈은 늘 거기에서 멈추지만 말이다.
영화의 초반은 어느 고등학교에서도 볼 수 있을법한, 그러니까 주인, 그리고 그녀의 친구들이 성적 호기심을 해소하는 갖가지 에피소드들을 그린다. 주인이는 현재 진행 중인 연애로, 주인이의 절친인 유라(강채윤)는 야한 웹툰을 그리는 것으로, 십 대 소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나름대로 건강한 사춘기를 보내는 중이다. 그렇다면 <세계의 주인>은 십 대의 건전한 성생활을 보여주는 영화… 와는 거리가 멀다. 발랄한 영화의 도입부는 주인이가 겪은 엄청난 사건의 참혹함과 복잡함을 역설하기 위한 대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주인이의 같은 반 친구, 수호(김정식)가 동네에 이사를 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성범죄자의 이사 반대 서명을 주인이에게 요구하며 전혀 다른 국면으로 머리를 튼다. 주인은 서명문의 한 문구, 그러니까 “성범죄 피해자들이 평생을 고통받으며 살아간다”는 대목에 동의할 수 없다며 서명을 거부한다. 완전히 인생이 망가진다든지,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는 표현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둘은 첨예하게 대립하고 결국 그들의 갈등은 주인이 수호를 가격하는 것으로 정점에 이른다.
이쯤 되면 반 아이들도, 관객들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주인이 예민하게 구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녀는 정말로 성범죄의 피해자인지. 발랄한 에너지가 충만한 청춘 영화는 과연 주인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추적하는 미스터리극으로 대치된다. 수호와의 몸싸움으로 인해 수호와 교장실로 불려간 주인은 어쩔 수 없이 본인의 과거를 털어놓는다. 그리고 그날, 몇 년을 눌러 참았던 분노와 회한이 주인을 잠식해 버린다. 끝도 없는 그녀의 절규는 세차장의 물 소리에 파묻혀 버린다. 차 안에서만 울 수 있는 주인에게 절규가 필요할 때마다 엄마, 태선(장혜진)과 주인이 세차장에 오는 이유다.


앞서 언급했듯, 영화 <세계의 주인>은 청초한 외피를 가졌지만, 그 내부가 깊고 두터운 영화다. 마치 주인과 주인의 삶이 그러하듯 말이다. 극명하게 다른 영화의 전반과 중반 이후, 즉 보여지는 주인의 모습과 실제 그녀의 이야기, 두 개의 드라마의 끝에서 영화는 하나의 단호한 ‘성명’을 전한다. 그것은 한 소녀가 지켜낸 존엄에 대한 찬사다. 영화는 주인이 그토록 처절하게 지켜낸, 그리고 지켜나가고 있는 그녀의 소중한 일상과 존재에 대해서, 나아가 그녀와 비슷한 과거, 현재를 공유하는 수많은 존재들을 향해 나직한 경의를 전하는 것이다.

참으로 경이로운 영화다. 이토록 유연하며 굳센 영화가 있을까. 윤가은 감독은 그녀의 성공적이었던 전작인 <우리들>과 <우리집>에서도 더 진화하고 심오한 프로젝트로 모두를 놀라게 하는 중이다. 과연 좋은 영화의 미덕과 옳은 영화의 본을 함께 갖춘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영화는 토론토국제영화제를 필두로 곧 열릴 도쿄 필름엑스(Tokyo FILMeX)와 라이덴국제영화제를 포함한 유수의 영화제들로부터 초청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정말 오랜만에 자랑스러운 작품으로 ‘코리안 시네마’의 소식을 알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한국 관객들의 화답만 남았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