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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전, 여인들의 봄날은 어땠나…국립오페라단 <화전가>

입력 2025-10-26 10:39   수정 2025-10-27 08:37



1950년 4월의 경북 안동. 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두 달 전, 봄날의 고요 속에서 아홉 명의 여인이 모인다. 국군과 인민군이 38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그때, 그들은 환갑을 맞은 김씨의 집에 모여 화전놀이를 준비하며 하루를 보낸다. 초콜릿과 커피, 설탕을 주제로 한 여인들의 수다와 웃음이 이어질 때마다, 한 달 후 닥쳐올 전쟁의 비극을 알고 있는 관객들은 유쾌함 속에서도 애잔한 마음을 느낀다.



국립오페라단(단장 겸 예술감독 최상호)의 창작오페라 <화전가>는 우리가 결코 알지 못했던 '전쟁 전 여성들의 시간'을 무대 위에 되살린다. 이 작품은 ‘공식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우리의 어머니와 할머니들의 이야기다. 저마다 기억 속에 슬픈 사연을 지닌 아홉 명의 여성들은 자신의 상황을 대사와 노래로 풀어낸다. 이 작품은 광복과 전쟁을 견뎌 낸 우리 민족의 생명력, 그리고 세대 간 유대의 순간을 기록한다.

여인들의 무대로 그려낸 막내딸의 기억



전 세계 오페라 작품 전체를 통틀어 무대 위에 여성들만 등장하는 작품은 푸치니의 <수녀 안젤리카>뿐이었다. 최우정의 <화전가>는 한국 창작오페라 역사상 최초로 여성들이 작품 전막을 이끌어간다. 전쟁과 이념의 대립 속에서 ‘남성의 부재’는 단순한 설정이 아니라, 한국 여성들이 견뎌낸 시간의 초상이다.



작곡가 최우정은 전통 오페라의 형식을 고수하기보다 서양 음악극의 구조 위에 한국 근현대의 음악적 토양을 섞었다. 2막에서는 바흐의 '커피 칸타타'를 오마주하며, 커피를 처음 마시는 여인들의 호기심을 바로크풍 리듬으로 풀어냈다. 3막에서는 모차르트 오페라<돈 조반니>의 격정적 화성을 반복적으로 인용하며 극적 긴장을 조성했다. 4막의 홍다리댁 아리아는 ‘울고 넘는 박달재’를 연상케 하는 트로트 선율을 사용했다. 1막과 2막에서 아홉 명의 여성이 유니즌(동일한 음)으로 말하듯 노래하는 장면의 단조로움은 여성들의 연대감을 형상화하는 데 일조했다.



환갑의 '김씨' 역을 맡은 메조소프라노 이아경은 극의 중심에서 탄탄한 연기로 무대를 지탱했다. 정확한 피치와 긴 호흡, 따스하면서도 단단한 음색은 그녀가 지닌 30년 경력의 내공을 여실히 드러냈다.

작품 속 화자, 막내 딸 '봉아' 역의 소프라노 윤상아는 전쟁을 겪고 성장한 불안한 여인의 목소리와 발랄한 소녀의 생기를 한 무대에서 그려냈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15번'을 읊는 장면에서는 특유의 맑고 단단한 발성이 빛을 발했다. 고모 역의 김선정, 금실이 역의 오예은, 장림댁 역의 최혜경 등 다른 여성 성악가들의 앙상블도 각자의 개성을 살리며 조화를 이루었다. 국립심포니를 이끈 지휘자 송안훈은 최우정표 음악의 다층적 질감을 세밀하게 살려냈다.


오페라적 언어로 재탄생한 안동 사투리



오페라의 대본을 쓴 극작가 배삼식은 보수성이 강한 안동 지역의 사투리를 예술 언어로 승화시켰다. 상실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한국인의 정서를 품은 그의 문장은 최우정의 음악 위에서 단순한 구술체를 넘어 리듬과 운율을 품은 음악적 언어로 변모했다.

“빌 것(별 것)도 없는 인생이, 와 이래 힘드노?”와 같은 대사는 고단한 현실을 유머로 풀어냈다.
안동 사투리는 받침이 적은 특성 덕분에 외국 성악가들이 불러도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을 만큼 음악적으로 정제된 언어로 재탄생했다. 강한 억양은 그 자체로 음율이 되어 관객의 귀를 사로잡았다.

미완의 초연, 역사의 시작



4막으로 구성된 오페라 <화전가>는 완성도 높은 대사와 정밀한 음악으로 채워졌지만, 아쉬운 장면도 있었다. 1막에서 메조소프라노 이아경의 "나는 바라보네"독창 장면에서는 관객의 시야를 가려 관객의 집중을 방해했다. 또한 바로크풍 음악을 배경으로 한 커피 장면에서 부채춤 동작의 리듬이 음악과 맞지 않아 시각적 집중이 흐트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출가 정영두는 안무가 출신답게 공간의 흐름과 인물의 동선을 유려하게 엮어냈다. 안방, 대청마루, 마을 정자 등 여성들이 모여 있는 공간을 모티브로 한 회상의 무대는 오페라가 진행될수록 한 폭의 병풍처럼 겹겹이 펼쳐졌다. 의상디자이너 김영진이 만든 한복은 각 인물의 신분과 성격, 세대의 차이를 섬세히 드러내며, 무대 전체에 ‘한국적 미학’을 불어넣었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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