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렌지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렌지는 당귤나무 열매라서 굉장히 상큼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거기다가 왜 족을 붙이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199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렌지족’ 태풍(이준호 분)은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머리에 브리지 염색을 하고 클럽 앞에서 여유롭고 당당하게 젊음을 과시하는 태풍의 모습에서 피식 웃음이 나온다. 1990년대를 풍미했던 오렌지족에 대한 고증과 묘사가 당시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태풍의 젊음은 그야말로 태풍같은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1997년 불어닥친 IMF 외환위기는 모든 것을 바꿔놓는다. 태풍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태풍상사’는 도산 위기에 처하고 아버지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게 태풍은 시대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태풍상사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지난 10월 11일 첫 방영된 tvN 드라마 ‘태풍상사’는 한국인의 기억에 깊숙이 자리한, 그러나 꽤 오랜 시간이 흘러 이젠 다소 멀게 느껴지는 1990년대의 이야기를 소환한다. 과거를 다시 꺼내든 건 이 작품뿐만 아니다. 지난 10월 19일 종영한 JTBC 드라마 ‘백번의 추억’은 1980년대를 다뤘다. “오라이!”를 외치며 버스 안내양으로 일하는 친구 영례(김다미 분)와 종희(신예은 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 보였다. 두 작품 모두 시청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무려 30~40년 전 이야기가 2025년 방송가를 화려하게 채우고 있는 셈이다.
과거 이야기가 현재에 소환된 게 새로운 일은 아니다. ‘레트로’, ‘뉴트로’라는 용어가 이미 익숙한 것처럼 콘텐츠 시장에서 과거는 꾸준히 다뤄져 왔다. 하지만 최근에 불고 있는 복고 바람은 형태가 약간 다르다. 굳이 현재의 이야기와 결합을 시도하거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저 투박한 날것 그대로를 올려놓는다. 창작자들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철저한 고증에 몰두하기도 한다. 그래서 다소 촌스럽게 보일 때도 있지만 시청자들은 오히려 그 매력에 호응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시대 감성에 보다 집중하고 있다. 어쩌면 이제는 사라진, 그래서 더 소중한 낭만을 꿈꾸고 있는 게 아닐까. TV도 시청자도.
드라마뿐만 아니라 예능에서도 비슷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SBS 예능 ‘우리들의 발라드’는 ‘요즘 아이들이 부르는 그 시절 너와 나의 노래’라는 콘셉트로 진행된다. 발라드는 198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등장,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한 축으로 자리매김했다. 감성적인 표현으로 애절한 마음을 담아 노래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하지만 아이돌 그룹을 중심으로 한 오늘날의 K팝 시대엔 발라드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쿨하고 힙한’ 요즘 감성은 아니니까. 그러나 이 프로그램은 과감히 발라드를 꺼내들었다. 그것도 ‘요즘 아이들’로 불리는 평균 나이 18.2세의 참가자들이 이은미의 ‘녹턴’, 이승환의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 등 과거의 발라드를 부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색적이지만 새로운 감동을 선사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MBC의 예능 ‘놀면 뭐하니?’는 ‘80’s 엠비시 서울가요제’를 열어 호평을 받았다. 출연자들은 박남정의 ‘널 그리며’, 조용필의 ‘모나리자’ 등 1980년대 인기 가요를 열창했다. 다양한 장르와 소재의 음악들이 소환되어 듣는 즐거움을 선사했다. 나아가 1980년대 무대와 의상을 그대로 재현해 보는 즐거움까지 담아냈다. 그 시대에 TV를 틀어 가요제를 시청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렇다면 수십 년이 지난 지금 1980~90년대를 굳이 소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는 고속성장 시대에 힘입어 역동성이 펄떡였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뿐인가. 그 뒤에 따라온 처절한 고통, 그리고 이를 불굴의 의지로 극복한 역사까지 담고 있지 않은가. 저성장 시대인 오늘날엔 결코 느껴볼 수 없는 뜨거운 환희, 격정적인 통곡과 좌절이 뒤섞였던 시대인 셈이다. 그래서 한국 특유의 다이너미즘이 형성되고 발전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안에서 싹튼 문화도 오늘날 K컬처의 토양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해당 시기에 발라드, 댄스, 힙합 등 여러 장르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전하면서 팬덤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드라마 영역에서도 가족극에 국한되지 않고 로맨스, 청춘극 등 다양한 작품이 나오게 됐다. 1990년대 말부턴 드라마가 잇달아 해외에 수출되면서 한류의 시초도 마련됐다. 1980~90년대가 없었다면 지금의 K컬처 열풍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오늘날 드라마로 재현하기에 고증하는 재미가 쏠쏠한 시대에 해당하기도 한다. ‘태풍상사’ 속 사무실엔 투박한 CRT 모니터부터 텔렉스, 삐삐까지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다양한 아날로그 기기들이 등장한다. 사무실 풍경만으로 추억과 신선함을 동시에 선사하는 효과가 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방송사와 제작사는 시청 세대를 확장하고 있다. 중장년층에겐 추억을 선사하고 10~20대엔 신선함을 주는 전략이다. 오늘날 콘텐츠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풍요 속의 빈곤’을 경험하고 있다. 지나치게 자극적인 작품도 많고 어디서 본 듯 비슷한 콘텐츠도 많다. 하지만 과거를 다룬 작품들은 어딘가 어색해 보여도 순수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1980~90년대를 다룬 작품들은 사라진 ‘낭만’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의 내면은 예쁘고 멋지게 포장된 선물과 같은 형태가 아니다. 삐뚤빼뚤하기도 하고 못생기기도 해서 남들이 알게 될까 두려워지는 그런 마음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지만 오늘날 그런 건 전부 촌스러운 일이 되어 버렸다. 설레는 순간을 들키게 되는 것도, 투박한 마음을 조심스레 꺼내 보이는 것도 괜히 모양 빠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과거엔 이런 마음이 보다 소중하게 다뤄졌다. 그래서인지 1980~90년대를 다루는 드라마들도 그 마음 자체를 묘사하는 데 꽤 많은 비중을 할애한다. ‘백번의 추억’에선 영례가 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친구 재필(허남준 분)을 향한 마음을 담아 라디오에 사연을 꾸준히 보내는 모습이 나온다. 고백을 하고 싶지만 차마 보여주지 못한 애절한 마음이 라디오 감성과 어우러져 설렘과 안타까움을 함께 선사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마음도 그렇다. ‘태풍상사’에서 태풍은 아버지의 사랑을 뒤늦게 적금 통장을 보며 깨닫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 이름으로 다달이 은행에 가 적금을 넣었고 그 통장엔 다음과 같은 메모들이 남겨져 있다. “아버지는 너의 꿈을 응원한다. 너는 항상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적금 메모에 넣을 짧은 단어를 편지를 써 내려가듯 하나씩 소중하게 남기고, 그 편지가 언젠가 완성되어 아들에게 전달되는 순간을 꿈꿨을 마음. 오늘날의 메신저 대화로는, 전화만으로는 미처 다 전달되지 않는 뜨겁고 깊은 사랑이다.
결국 우리가 콘텐츠를 통해 과거를 소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바쁜 일상에도 잠깐 멈춰서서 마음을 들여다보고, 또 마음을 표현하는 낭만을 꿈꾸기 때문이다. 쿨하고 힙하게 보이는 건 진짜 속마음은 꺼내보이지 않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그런 콘텐츠와 음악은 이미 차고 넘친다. 때론 영어 단어로 표현해서 더 세련되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포장보다 더 중요한 건 조금 못생겼지만 소중한 마음 자체가 아닐까. 내가 잊고 있는 순간에도 열심히 뛰고 있는 심장 박동을 새삼 느껴보고, 저 아래에 깊이 묻어뒀던 깊은 감정도 솔직한 일상의 언어로 좋은 사람들과 나누는 것. 그것이 수십 년을 거슬러서라도 되찾고 싶은 낭만이 아닐까. 그렇게 그 시절을 담은 작품들을 보며 더 이상 낭만적인 과거에만 머물지 않고 낭만적인 오늘을 만들어가길.
김희경 인제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영화평론가 kimhk@inj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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