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렌티움(silentium). 침묵을 뜻하는 라틴어다. 이우환(89)은 이를 우리말로 묵시암(默視庵)이라고 바꿔 말한다. ‘고요함 속에서 바라본다’는 의미다. 그 말대로 침묵은 감각의 차단이 아니라 생동을 느끼는 길이다. 입을 닫을 때 비로소 눈과 귀가 열리는 법이기 때문. 묵시암이라는 단선적 표현을 입체적으로 펼쳐 본다면 ‘조용한 눈길로 만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거장 이우환이 탐구한 ‘침묵의 미학’의 요체다. 평소 “버리고 비우면 보다 큰 무한이 열린다”던 그의 철학과 맞닿은 개념이다.
짧은 글 한 줄로는 그 의미를 모를 수 있다. 그래도 괜찮다. 직접 가서 느끼면 된다. 일본 나오시마, 프랑스 아를에 있는 ‘이우환 미술관’을 방문하라는 무책임한 권유는 아니다.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에 이우환 공간 ‘실렌티움(묵시암)’이 지난 28일 문을 열었기 때문.
실렌티움은 호암의 정원 ‘희원’에 자리 잡았다. 두꺼운 철판 위에 돌 하나가 덩그러니 놓인 설치작업 한 점이 입구에서 관람객을 맞이한다. 이 작품은 침묵과 사색의 공간으로 이끄는 안내자다. 이우환은 “침묵 속에 머물며 세상 전체가 관계와 만남, 서로의 울림과 호흡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내에는 세 개의 방이 있다. 왼쪽 방의 ‘플로어 페인팅’은 이우환을 대표하는 작품 ‘다이얼로그(대화)’가 떠오른다. 중간 방 ‘월 페인팅’의 점은 극도로 절제된 붓놀림이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을 준다. 오른쪽 방의 ‘섀도 페인팅’은 돌 뒤에 드리운 그림자, 작가가 그린 그림자가 함께 드러난다.
실렌티움이 끝이 아니다. 희원 건너편 ‘옛돌정원’에는 대형 야외 조각 신작이 놓였다. 존재에 대한 이우환의 깊은 사유가 집약된 ‘관계항(Relatum)’ 시리즈다. 정원 입구의 ‘관계항-만남’, 호숫가에 직선으로 뻗은 20ｍ의 슈퍼 미러 스테인리스 스틸판과 돌로 구성된 ‘관계항-하늘길’, 스테인리스 스틸과 두 개의 자연석이 역동적 균형을 이루는 ‘관계항-튕김’ 등 세 점이 놓였다.
관계항-만남은 유일한 미완성작이다. 그래서 눈여겨봐야 한다. 지름 5ｍ의 스테인리스 스틸링 구조인 작품은 향후 고리 양쪽을 마주 보는 두 개의 돌이 더해질 예정이다. 사실 이우환은 채석장에서 작품에 쓸 돌을 골라 놨다고 한다. 하지만 설치하는 순간 이우환은 외쳤다. “이 돌이 아니다!” 그가 천착해온 관계항 개념은 단순히 사물의 물리적 놓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관객과 호흡하려면 자신부터 작품과 공명해야만 했고, 주변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돌을 만날 때까지 완성은 미룰 수밖에 없었다. 기다림 자체가 작품이란 얘기다.
실렌티움과 야외 조각들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은 공간 그 자체다. 희원은 호암을 찾는 이들이 가장 사랑하는 미술관의 백미로 꼽힌다. ‘차경(借景)’ 원리를 바탕으로 사람이 자연과 물 흐르듯 어우러지는 ‘한국식 정원’의 표본이기 때문. “내 작품은 보자마자 감각이나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생동감이 중요하다”며 이우환이 먼저 호암 측에 이곳에서 프로젝트를 해보자고 제안을 건넨 건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이 제안에 호암은 희원 건너편 옛돌정원까지 내놨다. 경사진 구릉, 탁 트인 호수 조망 등 다채로운 풍광을 지닌 이곳이 이우환의 조각과 조응해 깊이를 더한다. 옛돌정원은 1세대 조경 예술가 정영선이 디자인에 참여한 곳으로, 대중의 발길이 닿지 않던 호암의 ‘비밀의 화원’이었다. 호암 관계자는 “옛돌정원 경관이 희원 못지않게 아름다운 데다 이우환 작가가 프로젝트를 제안한 것을 계기로 공개하게 됐다”고 했다. 관람료는 2만5000원(기획전+희원+실렌티움+옛돌정원 관람), 다음달 4일부터 일반에 공개된다.
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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