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6년, 제 인생 처음으로 한국에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아름답게 쓰인, 모르는 사람의 편지였습니다."
지난 30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 광장에서 엔비디아의 그래픽카드 지포스의 한국 출시 25주년 기념행사차 모인 500여 명의 관중 앞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이렇게 운을 뗐다. 그의 옆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나란히 서 있었다. 황 CEO가 30년 전의 일화를 꺼내자 장내도 숙연해졌다. 그는 그 편지가 자신을 한국으로 이끌었고, 그 안에 담긴 세 가지 비전이 현실이 됐다는 고백이 이어졌다.
편지엔 한국을 초고속 인터넷으로 연결하고, 비디오 게임으로 세상을 바꾸고, 비디오게임 올림픽을 열고 싶다는 내용이 담겼다. 잠시 후 이 회장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 편지는 제 아버지가 보낸 것입니다."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 29년 전, 당시 무명이었던 스타트업 CEO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가 인공지능(AI) 시대의 서막을 연 '설계도'였음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같은 비전이 현실화된 건 이 선대회장의 경영 철학 덕분에 가능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로 요약되는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삼성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됐다. '싸구려' 취급받던 삼성 제품의 현실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이었다. 1995년 150억 원 상당의 불량 휴대전화 15만 대를 불태운 '애니콜 화형식'은 품질을 최우선 가치로 삼겠다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는 반도체와 같은 첨단 기술 분야에서 세계 1위에 오르기 위한 필수적인 토대가 됐다.
"S급 천재 한 명이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천재 경영론'도 비전 달성의 토대가 됐다. 이 선대회장은 세계 최고의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삼고초려를 마다하지 않았고, 파격적인 대우로 외부 전문가를 영입했다. 황 CEO에게 보낸 편지도 특정 기업이 아닌, 미래를 실현할 '천재'에게 투자한 그의 인재 철학을 명확히 보여준다. 경쟁사들이 투자를 줄일 때 오히려 투자를 늘리는 역발상 투자는 1993년 삼성 반도체 D램 세계 1위 등극의 발판이 됐다.
전국적인 초고속 인터넷망 구축 비전은 정부 정책과 맞물려 폭발적인 보급으로 이어졌고 , 'PC방'이라는 문화 산업을 발전키셨다. PC방은 e스포츠의 인큐베이터이자 고성능 하드웨어의 거대한 내수 시장이 됐다.

'비디오 게임 올림픽' 역시 2000년 출범한 월드사이버게임즈(WCG)를 통해 실현됐다. 삼성은 WCG의 핵심 후원사로서 e스포츠를 글로벌 스포츠 반열에 올렸고, 한국을 e스포츠의 종주국으로 만들었다. 이 선대회장은 단순히 제품을 파는 것을 넘어, 하드웨어(반도체), 인프라(인터넷), 소프트웨어(게임), 문화(e스포츠)가 선순환하는 거대한 '생태계' 자체를 설계한 것이다.
황 CEO는 이날 "한국의 PC방 문화와 e스포츠가 없었다면 오늘의 엔비디아는 없었을 것"이라며 이 선대회장을 치켜세웠다. AI 혁명을 이끄는 리더가 자신의 성공 신화의 뿌리가 30년 전 한 한국 기업가의 비전에서 시작됐음을 직접 인정한 셈이다.
'AI 깐부' 동맹은 AI 시대의 핵심인 반도체 공급망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전략적 행보로 해석된다. 삼성전자는 엔비디아에 5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인 HBM3E를 공급한데 이어 차세대 HBM4 까지 납품할 예정이다. AI 연산에 필수적인 고성능 메모리를 삼성이 공급하고, 엔비디아는 이를 통해 AI 기술 리더십을 유지하는 '윈윈'하는 구조다. AI팩토리와 로보틱스 등 분야로까지 협력이 확대되는건 GPU에서 시작된 파트너십의 자연스러운 진화로 해석된다.
업계 관계자는 "이 선대회장의 유산은 단순히 미래를 예측한 것을 넘어선다"며 "남들이 주목하지 않을 때 과감히 투자하는 용기, 미래를 할께할 최적의 파트너를 알아보는 안목, 그리고 산업의 판 자체를 짜는 전략적 사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평가했다.
김채연 기자 why2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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