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일 명품업계에 따르면 에르메스 남성복이 최근 그레이스 레이스 웨일스 보너를 새 CD로 선임했다. 1988년 부임해 37년간 남성복을 이끈 베로니크 니샤냥의 뒤를 잇는 세대교체다. 1990년 영국 출생인 웨일스 보너는 2014년 자신의 이름을 딴 패션 브랜드를 세운 뒤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2016년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 프라이즈, 2019 BFC·보그 펀드 수상, 2021년 CFDA 국제 남성복 디자이너상 등을 휩쓸었다.
에르메스뿐만이 아니다. 구찌는 지난 3월 뎀나 그바살리아를 새 CD로 영입했고, 발렌시아가는 올 7월 발렌티노를 25년간 이끈 피에르파올로 피촐리를 선임했다. 보테가베네타 또한 지난 1월 말 루이스 트로터를 수장으로 맞았고 베르사체는 3월 다리오 비탈레를 최고크리에이티브책임자(CCO)로 임명했다. 통상 십수 년에 걸쳐 이뤄지는 CD 교체가 최근 1~2년 새 동시다발로 나왔다.
CD는 명품 브랜드의 얼굴이자 ‘유산 관리자’로 불린다. 제품 디자인부터 마케팅 전략, 매장 이미지까지 명품의 미학과 톤을 전방위로 설계한다. CD 교체는 브랜드 전략의 전면 재편을 뜻한다.
명품 브랜드가 줄이어 CD를 교체하는 원인에는 실적 둔화가 있다. 세계 1위 LVMH의 1~9월 매출은 581억유로로 전년 동기 대비 4% 감소했다. 상반기 기준 순이익은 22% 급감했다. 케링그룹도 1~3분기 누적 매출이 14% 줄며 주력 브랜드인 구찌의 실적 악화 충격을 고스란히 받았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줄곧 높은 성장세를 보인 명품 업황이 급격히 꺾인 것이다. 업계에선 “명품 시장의 호황은 완전히 끝났다”는 부정적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자본시장에 보내는 신호의 의미도 있다. CD 교체는 투자자에게 ‘브랜드를 새롭게 하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경영자 입장에선 투자자의 신뢰를 얻고 브랜드를 혁신하겠다는 의미로 CD 교체만큼 좋은 수단이 없다. 2022년 버버리가 대니얼 리 선임을 발표했을 때 주가는 당일 3% 넘게 상승했다. 올 3월엔 베르사체 모회사 카프리홀딩스가 다리오 비탈레 CCO를 선임하자 주가가 하루 만에 8.3% 급등했다.
CD 교체가 실적을 좋게 하는 강력한 계기가 되기도 한다. 구찌는 알레산드로 미켈레 부임 직후인 2017년 매출이 전년 대비 44.6% 급증해 극적인 반전 드라마를 썼다. 보테가베네타도 대니얼 리 체제 첫해인 2019년 4분기에 매출이 9.4% 뛰었다.
국내에선 CD 교체가 일상적이지 않지만 일부 실적 부진 기업이 리더십 교체를 통해 반전을 꾀하고 있다. 한때 K뷰티의 대표 기업이었다가 부진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는 LG생활건강이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지난달 세계 최대 화장품기업인 로레알 출신 이선주 씨를 최고경영자(CEO)로 맞았다.
브랜드의 장기 비전을 세워야 할 CD 교체가 잦아지자 “창의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단기 성과에 치중해 트렌드만 좇는 식으로 브랜드가 획일화한다면 명품 업계의 불황은 오랜 기간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안재광 기자 ahnj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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