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월 9일 이른바 ‘2차 상법 개정안’이 공포되면서 자산 규모 2조원 이상 대규모 상장회사는 집중투표제를 정관으로 배제할 수 없게 됐다. 기존에는 정관에 관련 조항을 둬 집중투표제 적용을 막을 수 있었지만, 이번 상법 개정으로 대규모 상장회사의 선택지가 사라지게 됐다. 이 조항은 내년 9월 10일 이후 소집되는 주주총회부터 적용되며, 실질적인 논의는 2027년 정기 주주총회에서 본격화될 전망이다. 국내 상법은 비상장회사, 일반 상장회사, 대규모 상장회사별로 소수주주권의 범위를 다르게 규정하고 있는데, 주로 집중투표제를 정관으로 배제할 수 없게 된 대규모 상장회사가 그 대상이 된다.
또한 의결권 있는 주식의 0.5% 이상을 6개월 이상 보유한 주주는 주주제안권을 행사할 수 있어 소수주주의 이사 후보 추천은 비교적 쉽게 이뤄진다. 집중투표제가 시행되면 주주는 선임할 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부여받고 이를 특정 후보자에게 집중해 행사할 수 있다. 통상 이사 선임은 의결권이 있는 출석 주주의 과반수 찬성을 필요로 하지만 집중투표제하에서는 소수주주가 한 후보자에게 표를 집중해 이사를 선임할 가능성이 커진다. 사실상 득표순으로 이사가 확정된다.
현재 자산총액 5000억원 이상 국내 상장사의 집중투표제 도입 비율은 약 4.7%에 그친다. 실제 도입 기업 대부분은 공기업, 금융사, 소유분산 기업 등이다. 이번 개정으로 대규모 상장회사는 더 이상 집중투표제를 배제할 수 없게 돼 이사 선임 구조 변화도 불가피해졌다. 기존에는 출석 주주의 과반수 찬성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훨씬 적은 주식 수로도 이사 선임이 가능해졌다.
이 때문에 불만을 가진 주주들이 자신의 이해를 대변할 이사를 직접 추천할 유인도 커졌다. 집중투표제 도입으로 소수주주 이익을 보호하는 역할의 이사가 선임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지배주주가 존재하는 국내 상장회사의 경우 기존엔 출석 주주의 과반수 찬성을 얻기 어려워 소수주주가 비용을 들여 이사 선임을 제안할 유인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집중투표제가 시행되면서 소수주주가 이사 선임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불만을 가진 주주들이 자신의 이해를 대변할 이사 후보를 추천하는 사례가 늘어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집중투표제는 소수주주의 권리를 강화하고 지배주주의 전횡을 견제함으로써 대리인 비용을 줄이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 반면 이질적인 이사회 구성이 협력과 의사결정의 효율성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특히 특정 주주의 추천으로 선임된 이사가 해당 주주의 이해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으면 이사가 전체 주주의 이익을 공평하게 보호해야 한다는 상법상 의무와 충돌할 가능성도 있다. 이 제도는 소수주주가 회사의 장기적 발전에 부합하는 주장을 하는지 여부를 가리지 않기 때문에 단기 수익을 노리는 투자자가 ‘기업 사냥꾼’식으로 경영권에 개입할 여지도 있다. 이 경우 회사의 방어 비용이 증가하고 경영 역량이 분산될 수 있다.
대만 기업들은 시차임기제가 금지된 상황에서 이사 정원을 줄여 표 분산을 최소화하고, 주주 설득을 통해 내부 제안 이사의 지지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한국 기업도 이제 제도의 긍정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통상 외부 이사의 참여를 꺼리는 회사는 이사 정원을 축소하거나 시차임기제를 도입해 집중투표제 리스크를 줄이려고 한다. 그러나 복수 이사 선임이 이뤄지는 한 외부 이사 선임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따라서 기업은 이사회가 추천하는 후보가 회사와 전체 주주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점을 좀 더 명확하게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각 후보의 자질, 경력, 독립성을 철저히 검증하고 주주에게 충분히 설명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소수주주 추천 이사가 개입할 명분이 생기지 않도록 이해 상충 거래 점검 등 지배구조를 선제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집중투표제 도입은 피할 수 없는 변화다. 기업은 이를 새로운 위협이 아니라 이사회 경쟁력과 투명성을 강화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김혜성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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