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29일 경매가 한창인 서울 신사동 케이옥션 본사. ‘달동네 작가’ 정영주의 작품 ‘도시-사라지는 풍경 717’(2022) 차례가 되자 장내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시작가 4500만원에 출품된 이 그림은 치열한 호가 경쟁 끝에 1억1000만원에 낙찰됐다. 이날 낙찰총액은 약 35억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10월 경매의 23억원에 비해 50%가량 늘었다.
하루 전 열린 서울옥션 경매 분위기도 마찬가지로 뜨거웠다. 시작가 2억원인 데이비드 호크니 작품은 국내외 응찰이 쏟아져 3억7000만원에 낙찰됐고, 백남준의 ‘에디슨’은 시작가 2억원에 나와 3억5000만원에 새 주인을 찾았다. 이날 낙찰총액은 약 53억원. 지난해 10월 경매(30억원)에 비하면 70% 이상 증가했다. 수년간 냉랭하던 미술시장에 모처럼 훈풍이 불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022년 이후 줄곧 불황의 터널을 지나던 미술시장에 반전의 조짐이 보인 건 지난 3분기부터다. 4일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에 따르면 3분기 국내 9개 미술 경매사의 낙찰총액은 약 313억5000만원이다. 지난해 3분기(237억5000만원)보다 76억원(32%) 늘어났다.증가세를 이끈 건 고가의 대형 작품이었다. 올 9월 케이옥션에 출품된 이중섭의 ‘소와 아동’은 35억2000만원에 팔려 3분기 최고 낙찰가를 기록했다. 박수근의 1959년 작 ‘산’은 12억원에 팔렸다. 이런 추세는 10월 경매로 이어졌다. 케이옥션 경매에서는 이우환의 ‘바람과 함께’가 8억5000만원에, 김환기의 ‘무제’가 7억8000만원에 낙찰됐다. 서울옥션 경매에서는 쿠사마 야요이의 ‘인피니티 네츠’ 시리즈가 19억원에 새 주인을 찾았다. 미술품감정연구센터는 “전체적인 출품작은 줄었지만 작품의 질이 좋아지고 가격대가 높아지는 추세”라고 했다.
9월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프리즈 서울의 분위기도 비슷했다. 이 행사에서는 마크 브래드퍼드의 신작 ‘그래, 그럼 사과할게’가 약 63억원에 판매됐다. 역대 한국에서 열린 아트페어 판매작 중 최고가 기록이다. 화이트큐브와 타데우스로팍이 게오르그 바젤리츠의 작품을 각각 20억원대에 팔았고, 학고재갤러리는 김환기의 회화 ‘구름과 달’을 새 주인에게 20억원에 넘겼다. 미술계 관계자는 “시장이 오랫동안 바닥을 다졌는데 이제야 조금씩 회복할 기미가 보이는 것 같다”고 했다.
근본적으로는 미술을 향한 사회 전반의 관심이 높아져 시장의 저변이 넓어진 영향이 컸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대중의 관심이 수요를 불러일으켜 작품값을 높이는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김창열 화백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양대 경매사의 지난달 경매에 나온 김창열 작품은 총 10점. 이 중 출품 취소된 2점을 제외한 모든 작품이 새 주인을 찾았다.
‘투자 수요’가 줄어들며 전통적인 블루칩 단색화 작품의 가격이 하락세를 보인 반면 ‘소장 수요’가 늘어나며 마음에 드는 작가의 작품에 과감한 지출을 감수하는 컬렉터가 늘었다. 지난달 케이옥션 경매에서 원계홍의 ‘장미’는 시작가(300만원)의 다섯 배가 넘는 1700만원까지 오르며 눈길을 끌었고, 서울옥션 경매에 나온 김선우의 ‘랑데부’는 2900만원에서 경매를 시작해 7100만원으로 추정가 상단을 뚫었다. 국내 증시가 역대 최고 수준의 호황을 기록하고 있는 것도 긍정적인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역사적으로 증시 등 다른 자산시장이 호황을 맞은 뒤 미술시장에 자금이 유입된 사례가 많았다.
다만 지나친 낙관은 이르다는 목소리도 있다.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주요 작가, 작품으로의 쏠림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 미술시장 분위기가 반전됐다고 판단하기엔 이르다”며 “불확실성이 심한 상태”라고 말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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