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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에 뿌려진 오토니엘의 빛…페트라르카의 사랑을 품다

입력 2025-11-06 17:00   수정 2025-11-07 01:50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프랑스 남부 도시 아비뇽. 중세의 위엄을 간직한 교황청의 웅장한 공간 속에 현대미술의 빛이 스며들었다. 유리 작품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프랑스 현대미술가 장미셸 오토니엘이 대규모 프로젝트를 선보이고 있어서다. 주제는 ‘오토니엘 코스모스 혹은 사랑의 유령’(OTHONIEL COSMOS ou Les Fantomes de l’Amour)이다.

이번 전시는 교황청을 중심으로 아비뇽 다리, 포메르 목욕탕 등 10개 장소에 260여 점의 작품이 설치됐다. 2025년 아비뇽의 유럽 문화수도 지정 25주년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3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다. 원래 교황청 내부로 한정될 예정이었던 전시는 작가의 제안으로 시내 전역으로 확장됐다. 무심히 지나쳤을 법한 유적지들이 새로운 숨결을 얻었고, 미술관이 된 도시 속에서 보물찾기하듯 걷고 또 걸었다.
페트라르카의 시(詩), 유리로 번역하다

오토니엘은 파리 프티 팔레, 베르사유궁전 정원, 덕수궁 등 역사적 장소에서 대규모 설치 작업을 선보이며 ‘공간과 교감하는 예술가’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진가는 언제나 장소와의 만남에서 드러난다. 자연, 건축, 연못, 궁전 등 다양한 공간과 조화를 이루는 그의 작품은 공간을 빛으로 일깨운다. 반짝이는 유리 표면이 건축과 조응해 주변 풍경을 담아낸다. 작품과 장소가 서로를 비추며 새로운 서사가 탄생하고, 관람객은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순간 속으로 자연스레 들어선다. 역사적 아우라가 담긴 장소에서 작품과 마주하는 순간은 쉽게 잊히지 않을 감동을 남긴다.

작가는 아비뇽을 종교적인 도시가 아니라 ‘사랑의 도시’로 해석한다. 그 해석의 기초에는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의 <칸초니에레>가 있다. 단테의 신곡과 더불어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학을 대표하는 이 작품은 중세의 신 중심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의 사랑으로 시선을 돌린 전환점이었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가 그의 형식을 계승했고, 리스트가 그의 시를 음악으로 옮겼다. 오토니엘은 그 계보를 유리로 이어간다.

전시의 중심에는 페트라르카와 라우라가 처음 만났다고 전해지는 생 클레르 예배당이 있다. 이곳에 놓인 하트 모양 조각 ‘심장’(le cœur)은 전시 전체의 심장부이자 해석의 키워드다. 페트라르카의 이루지 못한 사랑은 동성 연인의 죽음을 경험한 오토니엘의 개인사와 자연스레 맞닿는다. 오토니엘은 종교적 숭고함의 영역을 ‘사랑’으로 확장하며, 중세의 신학적 질서 위에 인간의 감정을 새로 새겨 넣는다. 사랑은 오토니엘이 중세의 권위를 대신해 찾아낸 현대적 숭고함의 원천이며, 종교 없이도 영성에 이르는 길이다.
빛으로 흐르는 우주…성스러움의 재해석

오토니엘의 예술을 관통하는 개념은 ‘누미노제(Das Numinose)’다. 독일 신학자 루돌프 오토가 제시한 이 용어는 인간이 성스러움 앞에서 느끼는 신비롭고 초월적인 감정을 뜻한다. 오토니엘은 스스로를 “특별히 종교적이지 않다”고 말하지만 그의 작품은 자연스럽게 영적 체험을 선사한다. 중세의 권위와 현대 유리의 빛이 대비되는 교황청 내 작품들은 SBNR(Spiritual But Not Religious), 즉 ‘비종교적 영성’을 구현한다. 종교적 교리 없이도 숭고함을 느끼고 싶은 현대인의 욕구에 응답하는 방식이다.

전시의 백미는 교황청 대예배당에 설치된 ‘코스모스’와 ‘푸른 강’(Cosmos et Riviere Bleue)이다. 길이 52m, 높이 20m의 공간 바닥에 7500개의 푸른 유리 벽돌이 강물처럼 흐르고, 천장에는 지름 5m의 천체가 움직이듯 떠 있다. 고딕 양식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들어오는 자연광이 유리 표면에 반사돼 별빛처럼 반짝인다. 수백 년의 시간을 품은 견고한 석조 벽과 깨지기 쉬운 유리구슬. 두 재질은 영속성과 찰나의 순간을 한 공간 안에서 엮어내며, 웅장한 권위의 건축을 빛과 사랑의 영역으로 변모시킨다. 이곳에서 느껴지는 신비는 설명할 수 없는 경외와 매혹이었다. 오토가 말한 누미노제의 감각을 내면 깊숙이 일깨운다.
아르데코 목욕탕, 물소리로 깨어나는 기억
국가문화유산으로 보호받는 건물에 구조를 훼손하지 않고 대형 작품을 설치하는 일은 까다로운 과제였다. 오토니엘 팀은 기존 아치 구조의 미세한 틈을 활용해 보이지 않는 강철 구조물을 설치했고, 작품 무게를 분산해 건물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했다. 이 정교한 공정은 엔지니어, 보존 건축가, 문화재 당국의 협업으로 완성됐다.

아비뇽을 걷다 보면 교황청의 장엄함과는 대조적으로 일상적 공간도 눈에 띈다. 아르데코 양식의 공중목욕탕 ‘레 뱅 포메르(Les Bains Pommer)’다. 1891년 벨 에포크 시대에 개장한 이 목욕탕은 1970년대 폐업 후 오랫동안 방치됐다가 복원 과정을 거쳐 올해 ‘포메르 목욕탕 박물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오토니엘은 이 고요한 공간에 유리 분수 작품을 설치했다. 욕실마다 흐르는 물소리와 반짝이는 유리의 빛이 어우러지며 잊힌 시민들의 일상이 서서히 되살아난다. 아비뇽시는 아르데코 100주년에 맞춰 복원된 이 공간에 오토니엘 작품을 초대해 도시 재생과 문화 홍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이번 프로젝트는 작가 개인의 예술적 성취이자 프랑스 문화 정책의 결과물이다. 프랑스 헌법은 문화를 모든 시민의 권리로 명시한다. 오토니엘 작품이 교황청과 박물관, 광장 등 다양한 공간을 아우르며 도시 전역에 설치된 건 예술이 일상 속으로 스며들도록 한 프랑스 문화 행정의 철학과도 맞닿는다. 1960년대 프랑스 문화민주화 정책은 모든 국민이 예술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80년대엔 지방 정부와 협력해 지역 특성에 맞는 문화사업을 추진하는 분권화 방식으로 발전했고, 이는 지역 중심의 문화 투자와 접근성 강화로 이어졌다. 아비뇽시는 이런 흐름 속에서 역사적 유산과 현대 예술을 결합해 문화 관광의 가능성을 확장했다.

이번 전시에서 구현된 비종교적 영성은 현대인의 내면적 갈망에 응답한다. 동시에 예술이 문화산업의 일부가 된 현실도 비춘다. 신을 향하지 않는 영성은 결국 어디로 향하는가. 아비뇽은 그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 대신 스스로 발견하도록 초대한다. 교황청의 푸른 유리 벽돌 옆을 걸으며, 목욕탕의 물소리를 들으며, 생 클레르 예배당의 붉은 심장 앞에 서며. 예술이 인간을 고양시키는 힘과 경제적 가치로 측정되는 현실 사이에서, 아비뇽은 하나의 균형점을 보여준다. 그 속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답을 찾게 될 것이다.

아비뇽=김인애 아르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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