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반도체 개발의 속도와 비용 구조 자체를 바꾸고 있습니다.”
조명현 세미파이브 대표는 최근 경기 성남시 야탑동 본사에서 본지와 인터뷰에서 “우리는 ‘디자인하우스’를 넘어 설계를 표준화·자동화하는 ‘디자인 플랫폼’ 회사로 진화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TSMC가 제조를 플랫폼화해 산업지형을 바꾼 것처럼, 설계도 플랫폼이 중심이 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 조 대표의 생각이다.
조 대표는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전자공학 석사와 박사를 취득한 반도체 설계 전문가다. 조 대표는 다른 동기생들과 달리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을 첫 직장으로 택했다.
BCG에서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경영 전략을 자문하며 조 대표는 인공지능(AI)시대엔 다품종 소량생산의 주문형 반도체(ASIC) 수요가 늘고, 설계의 속도와 효율성이 화두로 떠오를 것을 직감했고, 2019년 세미파이브를 설립했다.
세미파이브는 팹리스와 파운드리를 연결하는 디자인 하우스로 출발했다. 디자인하우스는 팹리스가 만든 회로를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가 실제 제조할 수 있게 물리적인 도면으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퓨리오사AI, 리벨리온 등 국내 대표 AI반도체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의 칩이 세미파이브를 거쳐 삼성 파운드리에서 양산이 이뤄졌다.
세미파이브는 이 경계를 확장했다. 세미파이브는 2019년부터 재사용 가능한 설계자산(IP)을 축적하고, 설계 과정을 자동화하는 기술 개발에 주력해왔다. 이를 통해 스펙(제원)작성, 아키텍쳐 설계(설계도 구성), 패키지 개발, 시스템 소프트웨어(SW)까지 자동화하는 플랫폼을 만들었다.
플랫폼화의 배경엔 18~24개월마다 반도체 칩에 집적할 수 있는 트랜지스터 수가 두 배씩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의 둔화가 있다. 공정 미세화만으로 성능을 끌어올리기 어려워지자 ASIC 수요가 폭발했다.
세미파이브는 중앙처리장치(CPU)·고속 표준 인터페이스(PCIe)·메모리 등 공통 블록을 모듈화해 반복 설계 부담을 줄이고, 필요 기능만 빠르게 조합한다. 결과적으로 개발 위험과 초기개발비를 낮추며 시장 진입 시점을 앞당긴다.
조 대표는 “고객은 차별화 알고리즘과 서비스에 집중하고 우리는 양산을 위한 나머지 과정을 ‘최단·최저 비용’으로 처리해주는 것”이라며 “1년 간 100억원이 들어갈 개발 과제를 절반의 비용으로 6개월 만에 완성시키는 등 성과를 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조 대표는 “투입 인력은 3분의 1, 개발 기간은 4분의 1까지 낮추는 게 목표”라고 덧붙였다.
수익 모델도 보통의 디자인하우스와는 다르다. 세미파이브는 단순 설계 용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파운드리 발주, 패키징·테스트까지 전 과정을 묶어 담당하는 대신 완성 칩 단가에서 수익을 확보한다. 조 대표는 “3년 먼저 시작해 축적한 IP로 경쟁사 대비 5년 이상 격차가 있다고 본다”고 자신했다.

조 대표의 비전을 보고 유수의 국내외 투자기관들이 세미파이브에 투자했다. 세미파이브는 지금까지 싱가포르 국부펀드 테마섹 산하 파빌리온캐피탈, 미래에셋벤처투자, 한국투자파트너스, 산업은행 등으로부터 2400억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이를 통해 한국 뿐 아니라 미국, 인도, 베트남, 프라하 등에 400명이 넘는 연구 인력을 확보했다. 세미파이브의 지난해 매출은 1118억원으로 전년(713억원) 대비 56.8% 성장했다. 연내 코스닥 시장 상장을 진행 중이다.
조 대표는 “디자인 플랫폼이 보편화되면 스펙은 고객이 주도하고, 설계·양산은 플랫폼이 책임지는 분업이 정착될 것”이라며 “반도체 설계의 TSMC가 되겠다”고 말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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