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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낙오자'가 지구를 지킨다면…

입력 2025-11-12 18:01   수정 2025-11-12 23:25


납치한 여자는 영리하다. 하루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먹지도, 화장실에도 가지 않지만 그의 술수에 넘어가면 안 된다. 서서히 심문을 시작할 때가 됐다. 정장을 입을 것이다. 나와 사촌은 아버지가 남겨 준 낡은 정장을 입고 그와 마주한다. 그는 간악하다. 외계인의 수장은 역시 다르다. 도통 입을 열지 않으니 이제 전기 고문으로 안드로메다에서의 그의 서열을 파악해 보려고 한다.

어딘가 낯이 익은 설정이 아닌지. 2003년 개봉한 한국 영화 ‘지구를 지켜라!’의 악명 높은 고문 장면을 떠올렸다면 정확히 맞다. 납치된 대기업 회장 강만식을 여성 최고경영자(CEO)로, 연인 납치범을 (사촌) 형제로 바꾼 설정을 제외한다면 위의 장면은 ‘지구를 지켜라!’의 고문 시퀀스를 어렵지 않게 떠올리게 한다.
◇할리우드판 ‘지구를 지켜라’
‘지구를 지켜라!’(감독 장준환)의 할리우드 리메이크작 ‘부고니아’(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위에 언급한 것처럼 약간의 설정을 제외하고 원작의 기본 줄거리를 비교적 충실하게 재현한다. 이야기는 한 공장에서 포장 노동자로 일하는 테디(제시 플레먼스 분)가 좀 모자라는 사촌 돈(에이든 델비스 분)과 함께 그가 일하는 기업 대표 미셸 퓔러(에마 스톤 분)를 납치하면서 본격 전개된다. 테디는 미셸이 안드로메다 고위층 외계인이라고 믿고 있으며 그의 어머니가 식물인간이 된 것은 이들의 생체 실험이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가 미셸을 납치한 것은 어머니를 구하고 미셸과 함께 안드로메다로 가서 지구를 해하지 않겠다는 외계인들의 약속을 받아오기 위해서다.

테디는 지구를 구하겠다는 마음을 먹을 정도로 이타적인 사람이지만 미셸을 고문하고 벌하는 것에는 극악무도함의 끝을 보인다. ‘부고니아’에서 그리는 주인공 테디의 다중성 그리고 그가 행하는 일련의 고문은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이런 ‘괴물’로 변한 이유에 대해 두 작품이 서로 다른 배경을 선택한다는 점이다.

가령 병구는 국가 폭력으로 상징되는 권력과 부정의 희생자다. ‘지구를 지켜라!’의 말미에서 납치된 강 사장은 자신이 외계인임을 시인하고 왜 지구가 없어져야 하는지 상술한다.

그의 일장 연설은 홀로코스트를 포함한 세계적인 전쟁과 학살, 무엇보다 한국의 군사정권기가 빚어낸 갖가지 만행 및 비극과 중첩된다.
◇“최고의 리메이크작”
‘지구를 지켜라!’에서 한국 독재정권기에 대한 은유가 분명했다면 다른 문화권인 ‘부고니아’의 배경은 다르다. 테디 역시 지구인이 폭력적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폭력을 가할 수 있는 인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국가) 권력의 피해자라기보다는 자본주의 논리와 계급적 순리의 피해자 혹은 낙오자에 가깝다. 그가 맞서 싸우는 제약회사 옥솔리스는 몇 차례의 사망사고에도 불구하고 임상시험을 서슴지 않는 회사이고, 환경을 해하고 있으며, 이제껏 일어난 모든 사건을 돈으로 해결한 기업이다. 테디의 엄마도 그중 한 케이스일 뿐이다.

거스 반 센트의 ‘싸이코’(1998), 스파이크 리의 ‘올드 보이’(2013)가 그랬듯 거장 반열에 오른 감독들 역시 리메이크에서는 혹평을 받았다. 이번 란티모스 감독의 ‘부고니아’는 최고의 리메이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훌륭한 재해석이다. 22년이라는 두 작품 간 시차는 많은 변화를 만들어 냈지만 관객의 호평만큼은 비슷한 기록 혹은 그 이상을 남길 것이 확실하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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