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텍사스 오스틴의 맥북 프로 공장으로 초청했다. 위탁업체 플렉스가 운영하는 이 공장은 ‘일자리 해외 이전’ 비판을 피하기 위한 애플의 상징적 생산기지였다. 트럼프는 곧바로 트위터에 “오늘 나는 텍사스에 고급 일자리를 돌려줄 새로운 애플 공장을 열었다”고 자랑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오스틴 공장은 곧 미국 제조업이 처한 구조적 붕괴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록됐다. 중국에서는 하루면 가능한 새 부품 조달이 미국에선 두 달이 걸렸고, 알루미늄 마감 케이스 확보에는 6개월이 소요됐다. 생산 속도는 느렸고 불량률은 높았다. 애플 엔지니어들이 “완전한 재앙”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결국 2023년 공장은 폐쇄됐다. 이로써 미국 내 애플 완제품 생산공장은 모두 사라졌다. 애플은 2007년 아이폰 출시 이후 중국에 초대형 공급망을 구축했다. 현재 전 세계 아이폰의 약 90%가 중국에서 생산된다. 직접 운영하는 공장을 두지 않는 애플은 폭스콘, 인벤텍 등과 함께 공급망을 중국 내륙까지 확장하며 노동력, 부품업체, 지방정부 인프라와 긴밀히 얽힌 ‘붉은 공급망’을 만들어냈다. 중국 내 위탁업체에 설치된 애플 전용 생산장비 투자 규모는 2009년 20억달러에서 2016년 445억달러로 폭증했다.
여기에 2018년 팀 쿡이 발표한 2750억달러 신규 투자를 포함하면 애플은 중국 제조업의 최대 투자자다. 이런 공급망 집중화는 화웨이, 샤오미, 럭스셰어, 고어텍 등 중국 현지 기업들의 경쟁력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시간이 갈수록 애플이 중국 공급망에 포획되는 구조를 낳았다. 미국 내 제조 생태계는 이미 사라졌고, 중국은 애플의 기술과 노하우를 흡수하며 세계 제조업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최근 출간된 <애플 인 차이나>는 지난 20년간의 이런 변화를 분석하면서 “애플은 시진핑의 ‘중국 제조 2025’의 가장 강력한 조력자가 됐다”고 지적한다. 기술·노하우를 담은 암묵지와 첨단장비, 인력 양성 시스템이 통째로 중국으로 옮겨가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트럼프 2기 정부의 관세전쟁은 단일한 무역정책이 아니라, 미국 제조업 공동화가 만들어낸 구조적 위기와 중국의 제조 굴기가 충돌한 단층선이다. 지난달 협상으로 싸움은 1년간 유예됐지만 다시 표면화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대립이다. 이런 환경에서 한국이 미국 조선업 부활의 핵심 파트너로 조명받는 것은 전략적 의미가 크다. 지난해 중국이 703척의 상선을 건조하는 동안 미국은 단 한 척에 그쳤다. 선박 건조를 위한 미국의 기술·인력·협력업체 생태계는 모두 붕괴한 상태다.
미국이 조선업을 살리려면 한국의 공급망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는 상선 분야를 넘어 구축함 순양함 원자력 추진 잠수함 등 군사·안보 협력으로 확장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전략적 위상은 이전과 달라질 수 있다. 문제는 애플 사례가 보여주듯 미국 내에서 사라진 공급망을 단기간에 복원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마스가’(MASGA) 전략이 실현되려면 한국의 인력·기술 협력을 포함한 대규모 공급망 재건 프로젝트가 필수다. 비자 제도, 전문인력 이동, 기술이전 구조 등 난제가 산적해 있다. 공급망 재건을 한국이 전략적 카드로 적극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것이다.
인텔의 공동창업자 앤디 그로브는 15년 전 미국의 제조 공동화를 우려하며 “제조 역량의 상실은 단지 일자리 감소가 아니라 혁신 주도권의 상실”이라고 경고했다. 중국의 제조 굴기 와중에 한국 조선업이 미국 전략산업의 핵심 변수로 떠오른 상황은 그의 통찰을 다시 소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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