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마하의 현인’이라 불리는 워런 버핏 벅셔해서웨이 회장이 구글 모회사 알파벳 지분을 3분기 대량 매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통적으로 기술주 투자를 기피해 온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선택이다. 최대 보유 주식인 애플과 뱅크오브아메리카(BofA)는 지난 분기에 이어 지분을 줄였다. 다만 전체 포트폴리오의 70%를 상위 5개 종목이 차지하고 있고, 새 종목 매입 비중도 크지 않았다. 확신이 강할 때는 분산보다 집중투자를 강조해 온 기존의 투자 철학을 잘 보여준다.
버핏 회장이 지난 5월 벅셔해서웨이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히며 투자자들은 버핏 회장의 마지막 행보에 주목하고 있다. 현금 보유액이 사상 최고치로 늘어난 만큼 경영진 승계 및 시장 과열 가능성 등 대내외적 불확실성을 고려해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평가다.
기술주 투자 시작
벅셔해서웨이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3분기 주식 보유 현황 공시(13F)에 따르면 벅셔해서웨이는 해당 분기 알파벳을 1785만 주(약 43억 달러) 매입했다. 이번 매입으로 알파벳은 벅셔해서웨이가 보유한 주식 중 10번째로 큰 주식이 됐다.
월가에서는 알파벳 투자가 기존 버핏의 철학에서 벗어난 행보라고 짚었다. 버핏 회장은 저평가된 주식을 사들여 장기간 보유할 수 있는 가치주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빅테크 기업에 대한 투자를 꺼려 온 이유다. 버핏 회장은 애플의 경우 소비재 기업에 가깝다고 본다. 알파벳 주가는 7월 중순까지 연초 대비 하락세를 보이다가 8월 말에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지수 상승률을 상회하기 시작했다. 시장에서는 주가 하락 기간에 알파벳을 매수했을 것으로 본다.
현금 보유량이 높은 상태에서 벅셔해서웨이가 기술주에 진입했다는 건 구글의 인공지능(AI) 역량이 그만큼 향상됐다는 방증으로 봐야 한다는 해석이 나온다. 앞서 구글은 2022년 11월 오픈AI의 ‘챗GPT’ 출시로 타격을 받았다. 서둘러 경쟁 서비스인 ‘바드’를 내놨지만 품질 문제로 초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구글의 핵심 수익원인 검색 광고 사업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확산했다. 하지만 올해 들어 구글의 AI 역량이 빠르게 개선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알파벳의 최근 분기 매출은 사상 최대치인 1000억 달러를 기록했다.
버핏 회장의 CEO 사임이 임박한 만큼 다른 경영인의 결정일 수 있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CNBC는 “차기 CEO인 그렉 에이블 부회장은 과거의 부담을 갖고 있지 않고 버핏 회장은 그에게 많은 업무를 넘기고 있다”며 “포트폴리오 매니저인 테드 웨슐러나 토드 콤스가 이런 움직임을 주도했을 수 있다”고 전했다. 향후 CEO가 바뀌면서 벅셔해서웨이가 기술주 투자를 더 과감하게 할 여지가 있다는 의미다.
보유 비중이 작던 일부 종목들도 추가로 담았다. 지난해 3분기 투자를 시작한 도미노 피자에 대한 비중을 확대했다. 현재 13억 달러에 해당하는 도미노 피자 주식 약 300만 주를 보유하고 있다. 지난해 1분기부터 보유한 처브 주식은 430만 주 늘렸다. 포트폴리오에서 8번째로 비중이 크다.
애플·금융주 지분 축소 이어가

벅셔해서웨이는 같은 기간 애플을 4200만 주 매각했다. 2분기(-2000만 주)에 이어 보유분을 줄인 것이다. 2년 전 매도를 시작한 이후 당시 9억5000만 주에 달했던 애플 지분은 2억3800만 주로 대폭 축소됐다.
높은 밸류에이션(실적 대비 주가 수준)이 매각 배경으로 꼽힌다. 대런 폴록 체비엇밸류매니지먼트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상대적으로 높은 밸류에이션이 최근 (애플) 매각을 주도하는 요인”이라며 “애플은 이런 높은 평가를 정당화할 만한 성장률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AI 경쟁에서 애플이 뒤처지고 있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다만 이번 매각을 벅셔해서웨이가 애플 투자에서 완전히 손을 떼겠다는 신호로 봐서는 안 된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애플은 여전히 벅셔해서웨이에서 비중이 가장 큰 종목으로 포트폴리오의 약 22.6%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버핏은 올 초 주주서한에서 애플에 대한 강한 신뢰를 보이기도 했다.
BofA 지분도 6.2%(3700만 주)가량 줄였다. 버핏 회장은 지난해부터 BofA 지분율을 낮춰 왔다. 이익실현과 동시에 금융업 리스크를 회피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금리 인상 기간 BofA 순이익은 크게 증가한 가운데 최근 미 중앙은행(Fed)가 금리 인하 사이클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1분기 매수했던 단독주택 건설 업체 DR호튼에 대한 모든 지분도 청산했다.
벅셔해서웨이는 3분기 61억 달러를 순매도했다. 12분기 연속 매수한 주식보다 매도한 주식이 많았다. 실적 개선과 주식 매도에 힘입어 벅셔해서웨이는 막대한 현금을 축적하게 됐다. 3분기 기준 현금보유액은 3817억 달러로 늘어나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미집행 자금(드라이파우더)이 그만큼 많이 쌓여 있는 셈이다. 월가는 벅셔해서웨이가 시장이 과열됐다고 보고, 매수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벅셔해서웨이는 지난해 5월 이후 자사주도 매입하지 않고 있다.
마지막 주주서한 공개
올해 말 은퇴를 앞둔 버핏 회장은 11월 마지막 주주서한을 공개했다. 그간 버핏의 연례서한은 그의 경영과 인생철학을 엿볼 수 있어 시장의 주목을 받아 왔다. 버핏은 앞으로 벅셔해서웨이의 연례 보고서 서한을 직접 쓰지 않을 예정이다. 차기 CEO인 그레그 에이블 부회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번 서한에서 버핏은 차기 CEO인 그레그 에이블 부회장에 대한 신뢰를 강조했다. 자신의 은퇴로 벅셔해서웨이의 주가가 하락할 수 있다고 보는 주주들을 달래기 위해서다. 그는 “주주들이 그레그에 대해 찰리 멍거 전 부회장과 내가 오랫동안 누려 온 신뢰감을 갖게 될 때까지 지분을 보유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어 “(그레그가) 신뢰를 얻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투자자들에 건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버핏 회장은 “주가는 변덕스럽고, 지난 60년 동안 세 차례 발생했던 것처럼 주가가 절반 가까이 하락할 수도 있다”면서도 “주가가 하락해도 절망하지 말라. 미국은 다시 돌아올 것이며 벅셔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말했다.



한명현 한국경제 기자 wis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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