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도 도입 20주년을 맞이한 국내 퇴직연금 제도는 이제 더 이상 금융 시장의 ‘조연’이 아니다.
2005년 제도 시행 이후, 꾸준히 불어난 적립금은 2025년 9월 말 460조 원을 육박했다. 이는 국민연금의 35% 수준 규모로,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자본시장’이자 퇴직연금이 사실상 ‘제2의 국민 노후 자산’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의 이면에는 ‘안정성’이라는 이름 아래 머물러 온 연평균 2% 수준의 낮은 수익률로 제도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정부는 이러한 낮은 수익률을 개선하기 위해 꾸준히 개혁을 추진해 오고 있다. 2023년 디폴트옵션 제도 도입, 2024년 실물이전 제도 도입이 있었고, 마침내 2025년 ‘기금형 제도’ 도입 논의가 본격화되며 퇴직연금의 수익률 개선을 위한 일대 변화가 눈앞에 다가왔다.
다가올 2026년은 이러한 제도적 변화가 본격적으로 시장에 반영되는 이른바 ‘퇴직연금 대변혁의 원년’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 2026년에 펼쳐질 퇴직연금 시장의 변화와 이에 대한 대응을 살펴본다.
의무 가입 확대되고 기금형 도입 가시화
2026년에 예정된 퇴직연금 시장의 변화는 정부 주도의 제도 개편이다. 먼저 정부 주도의 퇴직연금 의무 가입 대상 확대다. 300인 이상 사업장을 시작으로 2027년 100인 이상, 2028년 중소기업(5~99인), 2030년에는 5인 미만 사업장까지 가입 의무화가 단계적으로 확대된다. 이는 중소기업 근로자와 비정규직의 대거 편입을 의미하며, 시장의 저변 확대를 이끌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함께 기금형 제도 도입이 가시화되면서 기존 '계약형'으로만 이루어진 시장 구조에 큰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기금형 제도는 전문 운용기관이 적립금을 통합 운용하며 '규모의 경제'를 통한 수익률 제고와 운용 전문성 강화를 목표로 한다. 이 두 가지 변화는 퇴직연금을 '선택'이 아닌 '의무'의 영역으로, '방치'가 아닌 '전문적 운용'의 대상으로 전환시키는 강력한 촉매제가 될 것이다.
또한 국민연금 개혁 논의도 퇴직연금의 중요성을 더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정부는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13%로 올리고 소득대체율을 43%로 상향 조정하는 개혁안을 추진 중이지만, 이러한 조치만으로는 연금기금 고갈 시점을 근본적으로 늦추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는 곧 국민연금만으로는 안정적인 노후 준비가 어렵고 퇴직연금을 통한 추가 소득 마련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이처럼 제도적 변화의 방향은 분명하다. 퇴직연금은 이제 법적 의무이자, 사회적 안전망의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다.

베이비부머 은퇴기…인출 전략 등 상담 수요 폭발
퇴직연금 시장이 성숙하고 '머니 무브'가 활발해지면서, 가입자들은 더 이상 획일적인 서비스를 원하지 않는다. 특히 투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전문적인 상담과 개인화된 관리에 대한 니즈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2025년 경영자총협회에서 직장인 100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에서 57.1%의 가입자가 퇴직연금 운용 방법에 대해 '관심은 있지만 방법을 모른다'고 응답한 사실은, 금융사의 적극적인 가이드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시사한다.

특히, 2026년은 베이비부머 후반부(1963~1974년생)의 상당수가 대거 은퇴준비기에 진입이 예상됨에 따라 적립기의 자산 운용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인출기에 필요한 자산 운용 방법과 세금, 은퇴 전략 등 보다 심도 깊은 연금자산 컨설팅에 대한 니즈가 대폭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주요 사업자를 중심으로 기존과는 달리 고령층, 은퇴준비자를 중심으로 대면 상담을 해줄 수 있는 채널의 확보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기존에는 정기예금 중심의 확정금리 상품이 연금자산 운용의 중심축이었다면, 이제는 실적배당형 상품의 비중이 증가하면서 변동성과 손실 위험도 함께 증가함에 따라 포트폴리오 투자, 모델 포트폴리오 활용 등 다양한 투자 상품 라인업에 대한 종합적인 상담을 위해 보다 전문적이고 깊이있는 상담에 대한 요구가 많아질 것이다.
이처럼 2026년에 예상되는 퇴직연금 시장의 변화 중 하나로 심층적인 상담이 가능한 오프라인 전문 채널의 가치가 재조명될 것이다. 특히 가입자의 특성과 니즈에 맞춰 제공되는 고객 서비스는 각 퇴직연금 사업자의 연금에 대한 운영 철학이 담긴 핵심 서비스이므로, 가입자 입장에서는 이러한 점을 꼼꼼히 비교해 사업자 선택 시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연금자산관리, 투자 중심으로 재편
최근 퇴직연금에 대한 가입자의 가장 커다란 변화는 ‘원금 보장’ 중심의 상품 운용에서 ‘투자 상품’ 중심으로 운용 방식에 대한 인식 변화다. 특히 최근 증시의 훈풍을 바탕으로 상장지수펀드(ETF), 타깃데이트펀드(TDF), 로보어드바이저(RA) 등 투자형 상품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퇴직연금 시장 내 ETF 자산의 경우, 2021년 말 3.4조 원에 불과했지만, 2025년 9월 말 기준 37.5조 원을 초과하며 4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11배 이상 급격히 증가했다.

또 2024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행한 실물이전 제도를 통해 그동안 번거로웠던 업권 간 자산이전도 손쉬워지면서 가입자의 의식 변화와 함께 이러한 변화의 물결은 더욱 확대됐다. 지난 2023년 말 퇴직연금 자산에 실적배당형 상품은 49.1조 원을 차지했으나, 2024년 말에는 75.2조 원, 2025년 9월 말에는 105.1조 원으로 불과 2년도 안 된 사이에 2배 이상 투자 상품이 증가하며 연금 투자에 대한 인식이 크게 변화했다. 근로자들은 더 이상 퇴직연금을 '강제 저축'이 아닌 '능동적인 투자 수단'으로 인식한 것이다.
특히 은행권을 중심으로 이러한 투자 중심의 연금자산관리는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지난 2021년 하나은행에서 최초로 퇴직연금에서 ETF 투자를 시행한 데 이어 신한은행과 국민은행 등 은행권도 빠르게 ETF 시장에 참여했다. 이처럼 선두 퇴직연금 사업자를 중심으로 퇴직연금 시장은 투자 중심의 자산관리 시장을 만들어 가고 있으며, 2026년에도 포트폴리오 투자 중심의 자산관리 지원을 위해 다양한 서비스가 제공될 것으로 예상된다.

디지털·AI 서비스…사업자 무한경쟁
수익률 경쟁과 머니무브가 본격화되면서, 퇴직연금 사업자들은 생존을 위해 필사적인 혁신 경쟁에 돌입하고 있다. 기존 퇴직연금 시장에서는 단순히 수익률이 좋은 상품을 소싱해서 판매하는 것이 사업자의 핵심 경쟁력으로 여겨져 왔다면, 이제는 고객의 투자 성향에 맞도록 TDF, ETF는 물론, 채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투자 상품 라인업을 제공하고, 투자 후에 연금자산을 지속적으로 관리해주는 평생의 금융파트너(life-time financial partner)로 그 역할이 진화하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AI)의 성장과 함께 전통적인 금융 서비스를 넘어서 기술 기반의 연금자산관리로 사업자의 역할을 확장하는 것이다. 2025년부터 시행된 ‘RA 일임 서비스’의 등장은 그 혁신의 첫걸음이다. 정부가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퇴직연금에 대한 RA 투자일임을 허용하면서 은행을 비롯한 각 금융사들이 잇따라 관련 서비스를 출시했다.
업계 최초로 하나은행이 파운트와 함께 RA 일임 서비스를 선보였고, 이후 미래에셋자산운용, 한국투자증권 등 금융사가 잇달아 유사한 서비스를 출시했다. AI를 기반으로 제공하는 RA 서비스는 고도의 자산관리를 낮은 비용과 손쉬운 사용법으로 대중화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졌다고 평가한다. 이는 과거 고액자산가들만의 전유물이었던 투자일임 서비스를 일반 가입자도 받을 수 있게 돼 향후 연금 투자 시장의 저변을 넓히는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사업자들의 모바일 플랫폼 내 연금자산관리 서비스의 경쟁도 치열해지고있다. 각 금융사들은 자사 모바일 앱을 퇴직연금 관리 핵심 허브로 만들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하나은행은 전문가가 추천해주는 모델 포트폴리오를 카카오톡으로 받아보고 손쉽게 상품 변경을 할 수 있는 ‘하나MP 구독 서비스’를 출시했다.
신한은행도 퇴직연금 모바일 서비스를 서비스를 개편해 거래 편의성을 높였고, KB국민은행은 KB스타뱅킹 애플리케이션을 중심으로 비대면 채널 혁신 프로젝트에 착수하는 등 모든 사업자가 공통적으로 더욱 진화된 ‘초개인화 연금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는 경쟁의 본질이 ‘개별 상품의 수익률’을 넘어, ‘노후 자산을 편리하고 통합적으로 관리해주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업권별로는 전통적으로 안정성과 방대한 고객 기반이 우수한 은행은 프라이빗뱅킹(PB) 등 자산관리 채널과 연계를 통한 자산관리 시너지를 강조하고 있으며, 증권사는 다양한 상품 라인업(ETF 등)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또 보험사는 장기·종신연금으로의 수령을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신뢰에 기반한 책임 있는 연금 관리 중요
퇴직연금의 본질적 목적은 장기 수익률 제고지만, 그 전제는 소비자 신뢰 확보다. AI 기반 투자에서 알고리즘 편향, 복잡한 투자 상품의 불완전판매 가능성 등 새로운 리스크도 부상하고 있다.
먼저 실적배당형 상품 비중이 증가할수록 시장 변동성에 따른 손실 위험도 커지기 때문에, 금융사들은 투자 위험 안내, 적정성 진단, 기록·관리 체계 강화 등을 통해 소비자 보호 기준을 한층 더 강화해야 한다. 2026년에는 기술 혁신과 소비자 보호를 병행하는 ‘책임 있는 혁신’이 금융사 경쟁력의 핵심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또한 기술의 발전과 함께 퇴직연금 여러 분야에서 새롭게 도입하는 AI 관련 서비스는 각 사업자들에게 금융소비자 보호 책임과 새로운 제도 도입에 따른 규제 준수 리스크 관리에 대한 과제를 동시에 주었다. 각 사업자는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기술과 연계된 위험 요인에 대한 면밀한 관리 체계를 준비해 디지털 환경에서도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연금자산관리 경험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2026년 퇴직연금 시장은 ‘양적 성장’과 ‘질적 진화’가 동시에 폭발하는 대변혁의 시기를 맞이할 것이다. 의무가입 확대로 시장은 더욱 커지고, 기금형 제도 도입으로 업권 간 새로운 경쟁 구도가 형성될 것이다. AI 기반 서비스는 고객 경험을 크게 바꾸며, 소비자 보호 이슈는 사업자의 지속가능성을 좌우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에서 퇴직연금 사업자는 단순한 시장 점유율 확대보다는, 고객에 대해 어떤 철학과 가치를 제공하며 고객의 미래를 설계하느냐가 향후 퇴직연금 사업에서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퇴직연금 사업은 ‘단기간의 수익률 게임’이 아니라 가입부터 연금 인출에 이르기까지 평생에 걸쳐 ‘오랜 시간에 걸쳐 켜켜이 신뢰를 쌓아 가는 사업’이다.
디지털 혁신과 AI의 발달로 기술은 금융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지만, 그것이 진정한 고객의 신뢰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진정성 있는 책임이 반드시 뒷받침돼야 하며, 이를 통해 고객 노후를 책임지는 ‘평생의 금융파트너’로서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필요하다.
조영순 하나은행 연금사업단 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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