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로마에서 지난 10~12일 ‘인공지능(AI)과 의료-인간의 존엄에 대한 도전’을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교황청 생명학술원이 주관한 이번 학회에는 세계 각국 의사, 신학자, 철학자, 윤리학자가 모였다. AI가 의료를 어떻게 바꾸고 있으며, 그 변화가 인간의 존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논의하기 위해서다. 발표자들은 한목소리로 말했다. AI는 진단과 치료의 정확도를 높이는 도구지만 인간 존엄을 해치지 않도록 사용해야 한다고.그들이 공통으로 지적한 것은 의료의 본질이었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데이터 교환이 아니라 신뢰를 기반으로 한 인간관계라는 뜻이다. 아무리 뛰어난 알고리즘이라도 환자의 손을 잡아줄 수 없고, 눈물을 흘리는 환자에게 손수건을 건넬 수는 없다. 의사는 병을 고치는 전문가이기 전에 인간 고통에 반응하는 존재다. 이 신뢰와 공감이야말로 의료를 지탱하는 윤리적 토대이며, 사회적 계약의 핵심이다.
그러나 한국의 진료실은 이 이상과 거리가 멀다. ‘3분 진료’라는 말처럼 의사와 환자가 눈을 마주칠 시간조차 부족하다. 의사는 모니터를 보며 검사와 처방을 지시하고, 환자는 이미 익숙해졌다. “그만 물어보고 약이나 주세요”라고 말하는 환자가 늘어나고 있다. 환자나 의사나 서로를 시스템의 부속품처럼 대하는 한국 진료실에는 AI가 파괴할 인간의 존엄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이 현상은 단지 컴퓨팅 발전이라는 기술 때문이 아니다. 적은 재정으로 빠른 성장을 이룬 산업화 시대의 후유증과 의료를 이념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정치적 대립을 지속해 온 민주화 시대 부작용이 맞물리며 진료실은 점점 비인간화했다. 의사와 환자 모두가 제도와 효율에 종속된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AI는 단순히 ‘존엄을 침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기술’이 아니다. 이미 잃어버린 존엄을 되찾는 기술이어야 한다. AI는 환자의 표정과 언어, 생활 패턴을 분석해 의사에게 공감의 신호를 줄 수 있다. 의료진이 놓치기 쉬운 위험 징후를 감지해 돌봄과 복지를 연결할 수도 있다. AI는 인간을 대신하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남을 수 있도록 돕는 기술로 쓰일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기술은 언제나 인간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서구의 AI 윤리를 그대로 옮긴다고 한국 의료가 달라지지 않는다. AI가 인간을 위한 기술이 되려면 적극적인 목표 설정과 공공투자, 제도적 지원, 그리고 인문학적 성찰이 필요하다. 단순히 안전장치나 규제를 만드는 수준을 넘어 의료의 윤리적 토대를 다시 세우는 일이 필요하다.
레오 14세 교황은 학회 개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우리는 기계를 대화 상대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주변 사람의 얼굴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인간적인 모든 것을 인식하고 소중히 여기는 법을 잊게 될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그의 우려가 현실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법이나 제도보다 먼저 의사와 환자 스스로가 인간 존엄을 지키려는 자율적 노력을 회복해야 한다. 아직 진료실에는 인간으로서 환자와 의사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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