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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자르고 싶어"…아픔 겪던 30대男, 고통 자초한 이유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입력 2025-11-15 00:06   수정 2025-11-15 09:43


‘차라리 내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싶다.’

관절이 뒤틀리고 마비되는 아픔을 겪던 남자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매 순간 몰려오는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고통에 입에서는 비명이 새어 나왔고, 눈에서는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습니다. 그러면서도 남자는 멈추지 않고 손가락과 붓을 움직여 수천수만 개의 점을 찍어 나갔습니다. 자신에게 고문을 가하는 듯한 그 광경을 본 동료 화가, 폴 시냐크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지옥처럼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완성된 그림에는 더없이 조화롭고 아름다운 빛, 행복만이 가득했습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앙리 에드몽 크로스(1856~1910)였습니다.

크로스는 평생 잔인한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당시로서는 손쓸 방법이 없는 불치병이었던 류머티즘(류머티스 관절염) 때문입니다. 합병증인 홍채염 때문에 그의 시력은 계속 약화됐고, 화가로서는 ‘사형 선고’와 같은 실명의 공포도 그를 덮쳤습니다. 말년에는 여기에 암의 고통까지 더해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수없이 관절을 움직여 점을 찍어야 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화풍’, 점묘법을 놓지 않았습니다.


크로스는 왜 굳이 고통스러운 방법을 선택해 그림을 그렸을까요. 어떻게 그런 고통 속에서도 아름다운 이상향을 그릴 수 있었을까요. 마침 지금 국립중앙박물관(메트로폴리탄 미술관전)과 세종문화회관(샌디에이고 미술관전)에 크로스의 작품들이 나와 있습니다. 자신을 옭아매는 것들을 아름다움으로 바꿔낸 화가. 크로스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름을 두 번 바꾼 남자
1856년 프랑스 북부의 한 도시에서 태어난 그에게 부모님이 붙여준 이름은 ‘앙리 에드몽 조제프 들라크루아’. 하지만 그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이 이름은 부담스러워졌습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으로 유명한, 낭만주의의 거장 외젠 들라크루아를 연상시키기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가수로 활동하려는데 이름이 ‘마이클 잭슨’인 셈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름을 앙리 크로스(Henri Cross)로 바꿨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앙리 크로(Henri Cros)라는 조각가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거든요. 그래서 그는 이름을 다시 앙리 에드몽 크로스로 바꿨습니다. 자기 브랜드를 위해 이름을 두 번이나 바꾼 겁니다. 이처럼 크로스는 젊을 때부터 ‘반드시 화가로서 성공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야망을 품을 자격이 있었습니다. 미술 아카데미에서 정통 미술을 수련하며 탄탄하게 기본기를 다진 유망한 젊은이였으니까요.

화가가 되기 위한 훈련을 마친 스물다섯 살의 크로스는 1881년 미술의 중심지인 파리로 향합니다. 배운 건 칙칙한 사실주의 화풍이었지만, 그는 당시 한창 유행하기 시작한 인상주의를 곧바로 받아들여 재빨리 진화합니다. 점을 찍어 그림을 그리는 점묘법의 창시자 조르주 쇠라와 친구가 된 것도 이 무렵입니다.


하지만 이 때 크로스의 삶을 뿌리부터 흔든 시련이 시작됐습니다. 자가면역질환인 류머티즘(류머티스 관절염)이었습니다. 면역체계가 자신의 관절을 공격해 연골과 뼈를 영구적으로 파괴하고, 손가락과 손목 등이 뒤틀리는 변형을 일으키는 병. 급성 발작시의 고통은 통증 부위를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류머티즘 환자의 삶의 질이 암 환자보다 낮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게다가 손을 움직여 그림을 그려야 하는 화가에게 류머티즘은 더욱 치명적이었습니다. 인상주의 거장인 오귀스트 르누아르 역시 이 질병으로 말년에 크나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의사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증상을 조금이라도 낫게 하려면 따뜻하고 건조한 남쪽으로 가세요. 파리의 공기는 춥고 습해서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크로스는 어쩔 수 없이 남쪽 지중해 연안으로 이사를 가야 했습니다. 야망과 재능이 있는 크로스에게는 예술의 중심지 파리에서 밀려나는 것 자체가 치명적인 후퇴였습니다. 1891년, 그의 나이 서른다섯이었습니다.
고통을 딛고
크로스는 예술의 중심지에서 밀려난 그해 점묘법을 받아들입니다. 셀 수 없이 많은 미세한 점을 찍어 화면을 구성하는 점묘법은, 그림을 그리는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 중 하나입니다. 오죽하면 “점묘법의 창시자 쇠라가 서른두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이유는 점묘법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라는 속설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대작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건강을 해쳐가며 수십만개의 점을 찍던 게 쇠라의 삶이었으니까요. 더군다나 크로스는 류머티즘 환자. 손가락 관절을 정교하게 반복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점묘법은 최악의 고통을 주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고통을 참아내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라고 불리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빛이 찬란한 만큼 그늘은 짙었습니다. 프랑스의 중산층이 누리는 풍요 뒤에는 식민지와 시골 사람들, 그리고 도시 하층민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크로스는 이런 상황이 싫었습니다. 그가 꿈꾸던 건 모두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이상적인 세상. 이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먼저 그림으로 이상적인 세상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줘야 한다는 게 크로스의 생각이었습니다.

점묘법은 이런 신념을 보여주기 위한 완벽한 도구였습니다. 팔레트에서 강제로 섞여 탁해지는 물감과 달리, 캔버스 위 다채로운 색을 띤 ‘점’(자유로운 개개인)들이 관람자의 ‘눈’(사회) 안에서 ‘조화로운 아름다움’(이상 사회)을 이루는 것. 점묘법이라는 기법 자체가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원하는 크로스의 생각을 현실에 옮기는 수단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이는 예상대로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동료 화가는 크로스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붓질을 한 번 할 때마다 무거운 짐을 진 것처럼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점묘법을 시작한 지 4년째 되던 해. 그의 몸은 무지막지한 노동을 더는 버텨내지 못하게 됐습니다. 결국 크로스는 인정해야 했습니다. 쇠라처럼 작고 정밀한 점을 찍는 건 자신에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요.

아이러니하게도, 그 한계에서 크로스는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1895년부터 그는 점의 크기를 키웠습니다. 벽면의 작은 타일을 연상시키는 조금 넓어진 붓놀림으로 그림을 완성하기 시작한 겁니다. 때로는 붓 자국 사이에 캔버스의 맨 천을 의도적으로 노출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조금이나마 고통을 줄이기 위해 내린 선택이었지만, 색을 더 생동감 있게 빛나도록 의도한 결과물이기도 했습니다. 쇠라의 ‘원조 점묘법’이 보는 사람의 눈에서 색이 섞이는 광학(光學)이라면 크로스가 강조한 건 캔버스의 표면과 물감의 질감이 만들어낸 강렬한 효과였습니다. 덕분에 그림은 더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느낌으로 변했습니다.



파리에서 미술의 변방인 남부 지방으로 밀려난 것도 크로스를 도왔습니다. 사실 점묘법은 파리의 변덕스러운 날씨와 빛을 잡아내기 쉽지 않은 기법입니다. 순간의 인상을 잡아내는 인상주의가 파리에서 생겨난 까닭입니다. 하지만 남부 지중해 연안의 안정적인 빛은 점묘법을 적용하기에 이상적인 환경이었습니다. 질병과 이사가 역설적으로 혁신을 이끌어 낸 겁니다.
“복수하듯 그렸다”
그리고 마침내 크로스의 예술은 전성기를 맞습니다. 1905년 파리에서 열린 그의 첫 개인전은 엄청난 화제를 모으며 성공했습니다. 1907년에는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비평가(펠릭스 페네옹)이 그의 회고전을 기획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무렵, 20세기 미술사의 흐름을 바꾼 만남이 이뤄집니다. 1904년 앙리 마티스가 새로운 영감을 찾아 크로스가 사는 동네를 방문한 겁니다. 그곳에서 마티스는 우연히 크로스의 1893년작 ‘저녁 바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이상적인 풍경과 빛나는 색채를 본 날 이후, 마티스의 팔레트는 이전과 전혀 다른 색을 품게 됐습니다. 이 영향으로 나온 그림이 야수파의 서막을 알린 걸작 ‘호사, 평온, 관능’. 무조건 실제와 닮은 색을 칠하는 게 아니라, 화가의 상상력과 영감에 따라 자유롭게 색을 고를 수 있는 현대미술의 자유. 그 시작으로 평가받는 마티스의 뒤에는 사실 크로스가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크로스의 몸은 낡은 집이 허물어지듯 하루하루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수십년간 그를 괴롭힌 류머티즘은 갈수록 악화됐고, 그 합병증인 홍채염이 발병하면서 크로스는 실명할까봐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1909년, 그는 파리의 한 병원에서 암 진단을 받습니다.

그래도 크로스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전보다 더 필사적으로, 더 대담하게. 그가 그리는 그림은 이제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었습니다. 고통이 심해질수록 크로스는 실제보다 더욱 아름다운 색채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자신의 몸을 파먹는 병에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였습니다. 그의 동료 화가였던 뤼시 쿠스튀리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크로스는 자신의 관절을 변형시키고 마비시키는 끔찍한 관절염 발작에 마치 복수하듯 그림을 그렸다. 고통이 심해질수록 그림은 더욱 새롭고 신선해졌다.

삶의 한계, 그리고 속박
크로스는 말했습니다. “나는 행복을 그리고 싶습니다. 몇백년 뒤의 순수하게 행복한 존재들을...” 몸이라는 고통스러운 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지만, 그의 마음만큼은 수백 년 뒤의 행복한 이상향을 향해 있었습니다. 류머티즘에 더해 암의 고통과 싸우면서 꿋꿋이 그림을 그리던 크로스는 1910년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나이 54세였습니다.

비록 대중적인 인지도는 아직 높지 않지만, 그가 미술사에 남긴 업적은 확고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는 해가 다르게 높아지고 있습니다. 쇠라의 엄격하고 다소 답답한 점묘법에 숨통을 틔웠고, 마티스에게 영향을 주면서 그 이전의 미술과 현대미술을 연결하는 핵심적인 다리 중 하나가 된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삶은 이 세상이 준 한계와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줍니다. 어쩌면 삶은 사실 속박의 연속일지도 모릅니다. 나이가 들수록 할 일은 많아지고 책임은 커지며 몸은 낡아 갑니다. 학교에 가고, 공부를 하고, 직장에 다니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삶을 옥죄고 쥐어짜게 하는 하나의 굴레이자 고통입니다.

하지만 그 굴레 속에서 인간은 성장합니다. 사랑과 보람, 희망과 같은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은 사실 새로운 한계 속에서 고통스럽게 적응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치열한 투쟁 속에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크로스의 예술은 그 가장 찬란한 증거입니다.


<i>**이번 기사는 Color and Light: The Neo-Impressionist Henri-Edmond Cross(Ortrud Westheider 지음), 국립중앙박물관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각 전시 도록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류마티스 관절염 통증 관련 내용 작성에 도움을 주신 울산 방어진아산탑통증의학과 김호창 원장님께 감사드립니다.</i>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문화재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국내 문화 분야 구독자 1위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술 소식과 지금 열리는 전시에 대한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구독 중인 8만명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세 권의 책으로 곁에 두실 수도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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