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상자산이 기존 금융 시장에 던진 가장 큰 영감이 있다면 ‘가격 발견 기능’의 재발견이다. 전통 금융은 늘 자산의 내재 가치를 평가해 가격을 매기려 했지만, 크립토 시장은 그 역순으로 움직였다. 거래가 시작되고 유동성이 붙으면, 비로소 그 자산이 의미를 갖는다. 가치는 거래를 통해 만들어진다.
내재 가치 논란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가상자산이 지금의 지위에 올라온 것도 결국 이 가격 발견 기능을 가장 효율적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저 이미지 파일에 불과한 대체불가능토큰(NFT)이 수억에 거래되고, ‘아무 가치가 없다’고 스스로 선언하는 밈코인이 시가총액 수천억 원을 찍는 일은 전통 자산에서는 보기 어렵다. 실재하는 가치가 있어서 가격이 생기는 게 아니라, 가격이 먼저 생기니까 의미가 덧붙여지는 구조다. 이걸 반드시 바람직하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거래가 어려워서 시장에 올라오지 못하던 자산들을 끌어올 수 있는 흥미로운 방식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가격 발견의 효율성 극대화
비트코인도 처음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것을 사고팔면서 가격이 형성됐고, 이후에는 그 가격이 곧 탈중앙성을 바탕으로 한 가치의 근거가 됐다. 가치 저장 수단 및 가치 전달의 매개체라는 정체성은 가격이라는 신호를 통해 만들어진 셈이다. NFT나 밈코인처럼 실물 기반이 없는 자산이 수억 원에 거래되는 것도 이 같은 현상의 연장선이다. 실재하는 가치가 가격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격이 새로운 가치를 만든다. 이 역전의 논리가 가상자산 시장의 본질이자 매력이다.
이 가격 발견 기능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존재가 바로 ‘무기한 선물(perpetual futures)’이다. 선물 만기일이 없는 무기한 계약 구조는 거래자에게 사실상 무제한의 자유를 부여했고, 50배, 100배가 넘는 레버리지와 24시간 거래 가능한 시장을 탄생시키며, 크지 않은 자금으로도 대규모 거래량을 만드는 데 특화돼 있다. 지난 10월의 대규모 청산 사태에서 보듯 위험성이 극단적으로 높지만, 그만큼 가격 발견의 속도와 효율성은 어느 시장보다 빠르다. 거래 가능성 자체가 시장을 존재하게 하는 셈이다.

금융의 역사를 돌아보면, 가격이 만들어지는 구조를 세우는 것이 언제나 자본시장 혁신의 출발이었다. 주식 시장도 그 시작은 기업의 자산을 쪼개어 다수가 사고 팔게 하는 구조였다. 자금조달보다 거래가 주목을 받는 주객전도 현상 속에서도, 활발한 2차 시장은 투자금 회수 통로를 만들고 더 많은 자본을 끌어들였다. 배당이 거의 없는 기술성장주들의 사례를 보면, 사실 주식 시장 역시 가치보다 가격 중심의 시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금융은 더 많은 자산을 거래 가능한 형태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상품을 발명해 왔다. 상장지수펀드(ETF), 리츠(부동산투자회사) 등은 자산을 묶거나 쪼개어 유동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다. 부동산 하나로는 거래가 잘 안 되니 묶어서 상장시키고, 특정 섹터를 한꺼번에 사고팔 수 있도록 지수화시키는 식이다.
거래 어려운 자산을 가래 가능하게
그러나 이 방식으로도 한계가 있었다. 유동화에는 일정 규모 이상의 자본과 투자자가 필요하고, 자본은 한정돼 있다. 고가 미술품 조각투자나 비정형 실물자산 거래 시도들이 번번이 실패한 이유도 결국 유동성 부족 때문이다. 사모펀드 시장에서 일부 부동산이나 비상장 기업을 대상으로 투자 상품을 만들어내지만 거래가 원활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일정 기간 자금이 묶이는 폐쇄형 구조를 띠며, 이러한 특성은 초기 자금조달을 어렵게 만든다. 즉, 거래가 원활히 이뤄지지 않으면 가격 발견이 일어나지 않고, 가격이 없으면 시장도 없다.
이 점에서 크립토 시장의 무기한 선물 구조가 제도권 금융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실물자산이 실제로 오가지 않아도 그 자산의 가격을 두고 거래를 발생시키고 이를 뒷받침할 유동성 공급자가 있다면 가격이 만들어질 수 있다. 수요가 적은 자산이라도 레버리지를 통해 거래량을 늘리고, 거래자 간 포지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펀딩비(funding rate) 메커니즘을 통해 가격의 균형을 찾아간다. 유동성이 곧 시장의 존재 기반이자 생명줄인 것이다.
최근 전통 금융권에서는 실물자산의 토큰화(RWA·실물연계자산) 열풍이 불고 있다. 부동산, 채권, 주식 등 기존 자산을 블록체인에 올려 거래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단순히 토큰화에 그친다면 한계가 명확하다. 형태의 변화를 통해 글로벌 투자자 접근성을 넓히는 효과는 있겠지만, 거래가 활발히 일어나지 않는다면 결국 유동성이 붙지 않는다. 시장이 살아 숨 쉬려면, 그 자산의 가격을 사고파는 장이 필요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탈중앙 무기한 선물 거래소, 즉, Perp DEX(Decentralized Exchange for Perpetual Futures)가 주목받고 있다.


Perp DEX는 실물자산 없이도 그 자산의 가격을 기반으로 거래를 일으킨다. 이는 오프체인(실물) 자산의 가격 신호를 온체인에서 구현하는 방식이다. 레버리지를 통해 유동성이 모인 곳에서 거래가 활발해질수록 해당 자산의 참조 가격이 정교해지고, 이는 다시 오프체인 시장에도 영향을 미친다. 가격이 실물 시장보다 먼저 형성되는 셈이다. 이를 통해, 제도권 테두리 내에서는 거래가 어려운 다양한 자산군을 거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런 구조가 제도권 금융의 새로운 브리지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다. 이미 미국의 로빈후드는 유럽 사용자 및 적격투자자들을 대상으로 토큰화된 미국 주식 거래 및 가상자산 무기한 선물 서비스를 시작했다. 여기서 거래되는 주식토큰은 실제 주식의 소유권을 의미하진 않지만, 그 가격에 대한 노출(exposure)을 제공한다. 아직 실험적 단계지만, 이러한 행보는 앞으로 보다 다양한 자산을 거래 가능하도록 만들겠다는 방향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가격의 인터넷’ 만든다
블록체인 업계에서는 이런 실험이 더욱 적극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하이퍼리퀴드(Hyperliquid)는 ‘모든 자산이 온체인에서 거래될 수 있다’는 비전을 내세우고, 아스터(Aster)와 라이터(Lighter) 같은 Perp DEX 프로젝트들도 전통 자산을 온체인으로 가져오려는 시도를 강화하고 있다. 특히 아스터는 미국 주식을 기초로 한 24시간 무기한 선물 거래를 제공하겠다고 밝히며, 온체인 RWA 거래의 실제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이들은 가격 발견 기능을 전통 금융자산 영역까지 확장해 ‘가격의 인터넷’을 만들려 한다.
물론 넘어야 할 산은 많다. Perp DEX는 본질적으로 높은 레버리지와 투기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규제권 밖에서 움직이는 시장 구조를 그대로 제도권에 들여오기엔 법적·윤리적 장벽이 높다. 당국이 무분별한 고위험 거래를 용인하기는 어렵고, 설령 제도화에 성공하더라도 과도한 규제로 온체인 시장만의 자유도와 혁신성이 훼손될 수 있다. 현실적인 접근은 온체인 시장 전체를 ‘규제권 밖 중립 지대’로 두고, 제도권 기관들이 이를 활용해 유동성 확보 또는 가격 참조 수단으로 삼는 방식일 것이다.
결국 Perp DEX의 핵심 의미는 가격 발견을 극대화한 하나의 구조적 실험이다. 그 속도와 효율성은 기존 금융이 해결하지 못했던 ‘거래 부재’ 문제를 보완할 수 있다. 다만, 이는 마치 원자력을 핵무기로 쓸지, 에너지원으로 쓸지를 결정하는 문제와 비슷하다. 무기한 선물은 핵폭탄이 될 수도 있지만, 잘만 관리하면 원자력 발전소처럼 자본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온체인 무기한 선물은 그저 투기의 장이 아닌, 자산 시장의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올 수 있는 게임 체인저가 될지도 모른다.
박태우 스페이스바 벤처스 대표 tw@spacebar.im
-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