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7년 외환위기 때 잠시 경험하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잠시 머물고, 2022년 레고랜드 사태와 더불어 물가 상승에 따른 미국 중앙은행(Fed)의 공격적 금리 인상, 그리고 지난해 말 국내 정치적 불안 등에 의해 일시적으로 경험했던 1400원대의 환율이 이제는 마치 ‘뉴노멀(new normal)’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것이 현재 우리나라 외환 시장의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변화의 본질을 파악해보고 이에 대한 의미와 이해를 통해 내년도 환율의 방향성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20년 전, 경상수지 흑자 지속과 조선업 호황 및 대규 선박 수주에 성공한 조선업체들의 환헤지를 위한 대규모 선물환 매도(달러 매도)로 환율이 1100원을 깨고 900원까지 하락한 바 있다. 외환 시장에서 스무딩 오프레이션(smooth operation)을 지속하던 정부(외환당국)에서 생각한 원화절상 방어를 위한 비장의 카드가 해외 투자 활성화였다. 당시에는 개인뿐만 아니라 국내 기관들도 해외 시장에 제대로 눈을 뜨지 않는 상황이었다.
외환 시장 흔드는 서학개미 파워
하지만 이제는 지난 10년 동안 엄청난 규모의 연기금 해외 투자와 개인투자자들의 대규모 미국 주식 매수(달러 매입)가 이어지면서 외환 시장의 가장 중요한 변수이자 외환당국의 골치거리가 됐다. ‘국장 대신 미장’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해외 주식, 특히 미국 주식에 일찍 눈을 뜬 개인투자자들의 식견과 통찰력이 현재로서는 투자 자체의 이익과 환차익을 모두 거둔 것으로 보여진다.
여러 금융 시장에서 예측이 가장 어려운 것이 외환 시장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외환 시장은 국내 경제 여건(경상수지·금리·주식 시장), 수급적 요인, 외국인 주식투자자금, 미국의 경제 펀더멘털 및 주요 경쟁국인 중국과 일본의 환율 움직임 등 대외 변수, 그리고 환율 정책 수단이라는 변수 등 매우 복잡한 요인에 의해 항상 움직이기 때문에 환율을 맞춘다는 것은 ‘개구리가 어디로 뛸지를 맞추는 것과 같다’고 할 정도다.
일본에도 ‘와타나베 부인’으로 불리는 환 투자 세력이 있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금리차를 이용하는 것이다. 반면, 한국의 개인 해외 투자자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스마트하다"고 언급한 것처럼 미국 주식 시장과 국내 외환 시장에서 개미투자자의 근면한 파워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지난 10월 개인투자자들의 해외 주식 매수 규모가 68억 달러(10조 원)에 달했고 10월 말 현재까지 누적 잔고가 1775억 달러라는 사실 이를 잘 말해준다.
이처럼 한국 외환 시장은 과거 통상적인 수급 요인이던 경상수지, 외국인 주식 투자자금 주도의 자본수지 등의 움직임과는 별개로 개인투자자 및 연기금의 해외 투자에 더 크게 의존하는 구조적 변화를 겪고 있는 중이며, 이러한 추세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위기 수준 환율이 아닌 5가지 이유
올해 4월 이후 1350원대까지 하향 안정되던 환율이 국내 해외 주식 투자 지속, 대미 투자 관련 불확실성, 최근 글로벌 강달러 강세 반전 등 대내외적 요인에 의해 1460원대로 상승했다. 시장은 전고점인 1480원이나 1500원대의 새로운 산을 넘을 태세다. 많은 사람들이 체감적으로 위기 수준의 환율이라는 걱정을 한다. 그러면 적정 수준의 환율은 어디에 있을까.
첫째, 적정 수준의 환율 레벨을 금리차(interest rate parity), 경제의 잠재성장률 등 여러 경제학적 개념으로 중장기적으로 분석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환율은 비교 통화(USD)와의 절대평가뿐만 아니라 상대 국가(일본·중국 등 주요 경쟁국들)와의 상대평가(실질실효환율)도 봐야 한다. 이런 기준에서 일본의 엔화도 1990년 이후 100엔 수준에서 소위 2012년 아베노믹스로 알려진 광범위한 일본은행(BOJ)의 통화 완화 정책과 엔화 약세 유도의 결과는 아니지만, 이제서야 이를 탈피해 150엔대 높은 수준의 환율이 유지하고 있고, 중국 위안화도 1990년대 초 평가절하(달러당 3.7위안에서 8.2위안)를 단행하면서 현재까지 7.1위안대의 환율 수준이 유지되고 있다.
둘째, 현재의 원화 약세가 경제 펀더멘털이나 외화 유동성 문제에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과거 세 차례의 위기 즉 1998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 그리고 2020년 코로나19 위기에 비해 경제 체력이 좋아졌고, 특히 외환보유액 4200억 달러, 연기금 및 개인투자자들의 꾸준한 대외 자산(주식·채권) 매입으로 대외 순금융자산(해외 자산-해외 부채)이 1조 달러에 달한다. 이 때문에 현재 외환위기 트라우마를 떠올리는 외국인 투자자들은 많지 않다.
과거 환율 상승은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 한국 투자에 대한 환차손 우려로 자금 유출로 이어졌지만, 지금은 외국인들도 국내 민간 부문의 해외 투자 증가로 수급상 달러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대만의 경우와 유사)하고, 이는 우리나라의 해외자산 증가로 이어진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
셋째, 최근 환율 상승은 미국의 관세 부과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이다. 사실 관세전쟁은 환율전쟁이라는 말이 있다. 왜냐하면 관세를 부과하면 해당 국가에서 그만큼 자국 통화를 절하(환율 상승)해 관세의 영향을 중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미국 입장에서 그 어느 때보다 상대 국가의 환율 움직임을 예의주시(환율조작국 또는 관찰대상국)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대미 수출 관세의 영향을 최소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환율 상승의 압력이 있을 경우 물가 등 국내 경제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상승 압력을 시장에 맡기고 용인하는 것이다.
넷째, 시장의 가격 결정은 기본적으로 수요와 공급에 따라 움직인다. 2023년이후 수출 회복 및 최근 반도체 슈퍼사이클 등에 의한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에도 불구하고 연기금 및 개인투자자의 해외 주식 및 채권 투자로 지속적인 달러 수요가 발생해 환율이 상승하고 있는 것이다. 시장 자유경제에서 머니 게임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최근 국내 주식 시장의 활황에도 불구에도 좀 더 투명하고 기술 혁신과 인공지능(AI) 등 성장 산업을 주도하는 미국에 대한 자발적인 투자 증가는 머니 게임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다. 또한 정부의 2000억 달러(연간 200억 달러) 대미 투자는 당장은 환율에 중립적이지만 향후 민간기업의 대규모 대미 투자(MASGA 관련 1500억 달러 및 주요 대기업의 대미 투자 계획)는 달러 조달 측면에서 주요 달러 공급 주체였던 수출 업체들의 대미 투자용 달러 보유 심리를 강화시킬 수 있으며 시장은 이를 가격에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다섯째, 외국인의 주식 투자 형태도 달라졌다.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 한국에 대한 주식 투자는 한국 경제 상황뿐만 아니라 개별 기업에 대한 투자이기 때문에 과거에는 대부분 환헤지를 하지 않고 우리나라 경제가 좋아질 경우 환율 하락(원화 강세)과 주식 상승을 동시에 추구했다. 하지만 원화의 지속적 약세는 환헤지를 선호하게 됐고 이에 따라 외환 스와프(달러를 팔아 원화로 주식 투자함과 동시에 선물환 매입으로 환헤지를 하는 기법으로서 현물환 시장에서는 영향이 없음) 거래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 지고 있다. 외국인의 조 단위 주식 투자가 있을 경우 과거에는 당연히 달러가 공급돼 환율 하락 요인이 됐지만 최근에는 스와프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아 현물환 시장에 실제 달러 공급이 이루지지 않고 있다. 이는 일본에서의 외국인 투자 패턴과 유사한 형태로 환 오픈 전략보다는 주식 상승과 환헤지에 대한 평가익을 동시에 추구하는 형태로 볼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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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주식 시장에 깊은 조정이 닥친다면
시계의 시침과 분침(중장기), 그리고 초침(단기) 마저도 환율 상승을 가르키고 있는 상황이다. 중장기 추세가 뚜렷해 보이는 편도 고속도로같더라도 시장 본성상 가격은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데로 항상 움직이지는 않다. 어느 순간 급커브가 나올지 모르는 산길과 같다. 보이지 않은 것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것을 대비하는 것은 가능하다. 커브길의 산길에서는 속도를 늦춰야 달릴 수 있다. 지금은 보이지 않는 커브길을 추정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 주식 시장의 갑작스럽고 깊은 조정이다. 지난해부터 회자되기 시작하는 AI 거품론 대두와 올해 4월에 보여줬던 미국에 대한 신뢰 문제(글로벌 달러의 약세), 그리고 미국 노동 시장의 경색, 주택 가격 하락, 상업용 부동산 리스크, 그리고 관세에 따른 소비 둔화 및 높은 물가 수준 등으로 지금까지 세계 경제에서 가장 강한 회복력를 보였던 미국 경제가 어느 순간 서서히 하강 내지 침체로 치닫을 수 있다는 위험이다. 그럴 경우 미국 주식이 가장 먼저 반응하고 우리나라의 대미 주식 투자 열기는 식고 도리어 차익실현 후 달러화가 국내로 환류될 수 있다.
둘째, 연기금의 환헤지 전략의 변화 가능성이다. 연초 이후 보여줬던 미국 경제에 대한 신뢰 약화로 글로벌 달러화 지수(DXY)가 10%나 하락하면서 세계 유수의 연기금들의 환 관리 전략의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국내의 연기금들도 이와 같은 추세에 동조한다면 환헤지 전략의 변화로 국내 외환 시장의 중요한 변곡점이 생길 수 있다.
셋째, 대미 투자 관련 오해 부분이다. 정부 주도의 2000억 달러 대미 투자 외에 민간기업들의 대규모 대미 투자가 과연 달러 공급을 줄어들게 하는 요인인가를 신중히 생각해봐야 한다. 해외직접투자(FDI)를 위해 수출 대금을 팔지 않고 오히려 그 이상의 대미 투자를 한다는 것은 국내에서의 원화 지급 고정비용(투자·인건비 등)을 고려하지 않는 비현실적 가정이라고 본다. 그러한 대규모 투자는 외화를 사서하지 않고 차입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왜냐하면 향후 엄청난 환율 익스포저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다섯째, 충분한 외환보유액의 시장 통제력이다. 현재는 시장 변동성에 중점을 두고 있는 외환 정책 스탠스지만, 원화의 대외 가치 문제로 인식되고 국내 물가 상승 압력 등으로 외환당국(기획재정부 및 한국은행)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환율 수준에 도달했을 경우, 적극적이고 공격적 시장 개입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 일본 엔화가 160엔에 도달했을 때 일본은행이 대규모 시장 개입으로 시장의 일방적 방향을 전환시킨 것(140엔까지 하락)과 같이 한국의 외환당국도 국내 외환 시장 규모 대비 충분한 시장 통제력을 보유하고 있다. 외환 시장에는 ‘외환당국에 결코 맞서지 말라’는 격언이 있다.
어느 때보다 신중한 대비 필요한 시점
환율 상승은 수출 채산성 증대로 수출 증가에 일부 기여하지만 물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최근의 자산 가격 급등(부동산·주식·금)과 국내 경기의 회복은 당연 물가를 크게 자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환율 상승은 통화 정책의 제약 또는 전환(금리 인상)을 초래할 수도 있다. 수출 기업에는 어느 정도 긍정적 효과가 있는 반면 수입 업체, 특히 국내 소비용 수입 업체 및 수입 중간재 업체의 영업수지가 악화된다. 또한 환율 상승은 최근 유가 하락의 긍정적 영향도 상쇄시킨다.
리스크 관리는 보이지 않는 향후의 위험 요소를 사전에 차단 또는 억제시키는 것이다. 기관 및 기업뿐만 아니라 개인 해외투자자들도 본업(수출 및 투자 자산 자체의 수익률)에 충실하기 위해 다른 리스크, 곧 환율 리스크는 일정 수준에서 헤지(hedge)하는 걸 감안해야 한다.
KB국민은행은 기업 및 기관투자가들을 위한 다양한 환헤지 상품을 제공 및 상담해주고 있으며 개인투자자들을 위한 환헤지 상품도 개발 중이다. 2026년에는 산 넘어 산밖에 보이지 않지만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은 법이다. 어느 때보다 불확실성과 변동성이 커 보이기 때문에 기초자산(주식·채권 등)의 리스크뿐만 아니라 환율 리스크도 신중하게 대비할 필요가 있다.
이성희 KB국민은행 자본시장사업그룹 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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