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8월 31일 오전 9시,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 판정문이 우리 정부에 도착했다. ‘한국 정부가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에 2억1650만달러(약 3100억원)를 배상하라’는 내용이었다. 정부과천청사에서 밤을 새워 판정을 기다리던 한창완 당시 법무부 국제분쟁대응과장과 양준열 검사 등 법무부 실무진 10명의 기대와는 다른 결과였다.
외부에서는 정부 패소라는 평가가 쏟아졌지만 실무진의 판단은 달랐다. 한국 정부가 참여하지 않은 국제상업회의소(ICC) 판정문을 증거로 채택한 것은 ‘적법 절차 위반’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정부와 정부를 대리한 태평양 피터앤김 등 로펌들은 시나리오별로 미리 준비해둔 대응 방안에 따라 즉각 분석에 들어갔다. 오후 2시 브리핑에서 정부는 “취소 신청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판정이 나온 지 불과 5시간 만이었다.
론스타가 2023년 7월 판정에 불복해 취소 신청을 하자 정부도 9월에 신청서를 냈다. ICSID 역사상 판정이 전부 취소된 경우는 1.6%에 불과했지만, 희박한 확률에 베팅하기로 한 결단이었다. 그로부터 약 2년4개월이 흐른 지난 18일 ICSID 취소위원회는 1심 판정을 전부 취소했다. 검찰의 2006년 론스타 기소로 촉발된 법적 분쟁 이후 정부가 총력전을 펼쳐 국익을 지키려 한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론스타 사건은 2006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검찰은 공소시효 마지막 날인 11월 21일 외환카드 주가조작 혐의로 외환은행과 론스타를 기소했다. 당시 기소를 담당한 검사였던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증거가 부족한 상황이었지만 기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이었다”고 말했다.
2011년 3월 대법원은 안대희 전 대법관을 주심으로 론스타 주가조작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했고, 같은 해 10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유죄가 선고됐다. 대법원은 2003년 론스타가 외환은행 인수 직후 ‘외환카드 허위 감자설’을 유포해 투자자의 투매를 유도하고 의도적으로 주가를 하락시킨 시세조종 행위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이 판결은 이후 국제중재에서 한국 정부가 론스타의 부당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근거가 됐다.
2012년 1월 김석동 당시 금융위원장은 하나금융의 외환은행 인수를 승인했다. 론스타는 보유 지분을 3조9157억원에 하나금융지주에 넘겨 배당을 포함해 약 4조7000억원을 벌었다.
일각에서는 론스타에 징벌적 매각명령을 내리라고 요구했지만, 김 위원장은 법과 원칙을 고수했다. 2012년 6월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론스타와의 소송전에서 절대 지지 않을 것”이라며 “주가조작을 한 곳에 손해배상금까지 물어줄 수는 없다”고 단언했다. 13년 만에 그의 공언은 현실이 됐다.
주가조작 유죄 판결로 궁지에 몰린 론스타는 2012년 5월 한국 정부를 상대로 투자자-국가 분쟁해결(ISDS)을 제기하겠다고 통지했다. 2007년 HSBC에 외환은행 매각을 추진할 당시 금융위원회가 정당한 사유 없이 승인을 고의로 지연해 매각이 무산됐다고 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ICSID에 한국 정부를 상대로 46억7950만달러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중재신청서를 제출했다.
론스타의 중재신청을 예상한 정부는 즉각 범정부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 임종룡 당시 국무총리실장 주재로 국무조정실, 기획재정부, 외교부, 법무부, 금융위, 국세청 등 6개 부처가 참여했다. 이 TF는 13년간 정권이 바뀌고 담당 공무원이 20번가량 교체되는 와중에도 흔들림 없이 가동됐다.
13년간 한 팀으로 정부를 대리한 로펌과 소속 변호사들도 승리의 주역이다. 정부는 2012년 11월 법무법인 태평양과 아놀드앤포터 등 국내외 로펌을 선임했다. 태평양 소속으로 국내 첫 투자자-국가 분쟁사건을 맡게 된 김갑유 변호사는 조아라, 윤석준, 방준필 변호사와 함께 피터앤김을 설립해 나온 뒤에도 계속 사건을 맡았다. 태평양의 김준우·김우재 변호사는 금융 분야를 담당하며 한 팀으로 일했다.
2013년 10월부터 2015년 3월까지 양측의 서면 공방이 이뤄졌다. 준비한 서류만 해도 1t 트럭으로 3대가 나올 분량이었다. 이 과정에서 정부와 론스타 양측은 증거자료 1546건, 증인·전문가 진술서 95건 등을 제출했다. 법무부에서는 김철수, 조아라 과장(검사)이 정부 준비서면 작성을 주도했다.
2015년 5월부터 2016년 6월까지 미국 워싱턴DC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네 차례에 걸쳐 구술심리가 열렸다. 이 과정이 이번 승소의 결정적 고비였다고 한다. 1차 증인신문에서는 김석동·전광우 전 금융위원장을 비롯해 손주형 전 금융위 대변인, 이해선 전 금융정보분석원장, 2차 증인신문에서는 황도곤 전 삼성세무서장, 김명준 전 서울지방국세청장 등 국세청 관계자들이 증언했다.

중재 절차가 진행 중이던 2019년 5월 론스타와 하나금융이 별도로 진행한 국제상업회의소(ICC) 상사중재 판정이 나왔다. 판정부는 외환은행 매각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개입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문제는 ICSID 중재판정부가 2020년 1월 한국 정부가 참여하지 않은 이 ICC 판정문을 증거로 채택한 것이었다. 이에 정부는 “정부의 변론권과 반박 기회 없이 정부에 불리한 증거로 채택하려 한 것은 당사자주의 원칙을 위반한 것”이라며 ‘적법 절차 위반’을 문제 삼았다. 외환은행을 인수한 김승유 전 하나금융지주 회장도 증인으로 나서 “금융위의 개입은 없었다”고 반박했다.
정부는 론스타가 2020년 11월 제시한 8억7000만달러(당시 약 1조1688억원) 협상안도 거부했다. 한창완 당시 법무부 과장(현 태평양 변호사)은 “증거만 보면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다”며 “승소, 패소 확률, 예상 배상금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론스타 제안을 거부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2022년 8월 ICSID는 론스타에 2억1650만달러를 지급하라고 판정했지만, 정부는 포기하지 않았다. 론스타가 2023년 7월 취소 신청을 한 뒤 정부도 9월 판정 취소를 신청했다. 법무부에서는 김지언 과장과 양준열 검사가 취소 절차 실무를 담당했다. 올해 1월 영국 런던 구술심리에서 정홍식 법무부 국제법무국장은 다시 한번 적법 절차 위반과 결정적 증거 부재를 강조했다.
결국 ICSID는 1심 판정을 전부 취소했다. 1972년 이후 총 503건 중 전부 취소는 8건(1.6%)에 불과하다. 김준우 태평양 변호사는 “13년간 정부와 국내외 대리인이 ‘원팀’으로 완벽한 협업을 이뤘다”며 “정부 담당자가 바뀌는 동안에도 정보와 자료를 공유하고 일관성 있는 분쟁 전략을 유지한 덕분에 취소 결정을 이끌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허란/정소람 기자 wh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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