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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업 후보’에서 ‘완판 공기업’으로…조폐공사 반전의 모든 것 [케이스스터디]

입력 2025-11-25 09:30   수정 2025-11-25 09:31

[케이스스터디]


한때 공공기관 관계자 사이에서 떠돌던 말이 있다. ‘석탄공사가 넘버1, 조폐공사가 넘버2.’

현금 사용이 빠르게 줄면서 한국조폐공사는 ‘수요 축소가 불가피한 공기업’의 대표 사례로 취급됐다. 2025년 현실은 완전히 다르다. 올해 6월 대한석탄공사가 공식 폐업하며 70년 가까운 국내 석탄산업의 역사가 막을 내렸지만 조폐공사는 매출 내리막길을 스스로 끊어내며 대반전을 이뤄냈다.

화폐를 만드는 기관으로만 여겨졌던 조폐공사가 ‘돈 만드는 기술’로 화폐 요판화 사업, 컬래버 굿즈, 기념주화 같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면서 과거 ‘존립 논란’의 분위기를 뒤흔들어버린 것이다. 이제 조폐공사는 기념주화, 예술형 메달, 컬래버 굿즈로 매진되는 ‘문화 제조사’로 탈바꿈하고 있다. 오히려 다른 공기업들이 ‘혁신 비결’을 묻는 케이스가 됐다.
쓰레기가 굿즈로…부산물 굿즈 혁명
지난 11월 14일 한국조폐공사 온라인쇼핑몰이 마비됐다. 1000원권과 5000원권을 각각 이어 붙인 전지형 화폐를 한정판으로 판 날이었다. 이 제품은 “돈복이 온다”는 입소문을 타고 금세 매진됐다. 제품을 구매한 정준(40) 씨는 “새해 돈복이 붙길 바라며 집에 걸어두는 용도로 구매했다”고 말했다.

조폐공사 온라인쇼핑몰에는 돈으로 만든 굿즈들이 넘쳐난다. 기념화폐부터 화폐 굿즈까지 다양한데 그중에서도 최근 화제를 모은 제품은 버려지는 화폐 부산물, 일명 ‘돈가루’를 모아 만든 생활용품들이다.


계기는 사소했다. ESG를 고민하던 한 직원이 여권 제작 과정에서 나온 불량품을 녹여 상평통보 모양의 키링을 만들어온 것이다. 그때 성창훈 조폐공사 사장의 머릿속에 번쩍 스친 건 홍콩 근무 시절의 기억이었다. 홍콩 통화당국이 투명 돼지 저금통 안에 잘게 잘라낸 자국 지폐를 넣어 기념한 모습이었다.

“돈 만들 때 불량, 단재, 여백지 등의 폐기물로 버려지는 부산물이 1년에 100톤이에요. 대부분 소각 처리되면서 폐기비용도 추가 발생하고 환경오염도 야기하죠.”

이렇게 탄생한 것이 화폐 부산물을 채운 돈볼펜, 돈키링, 돈봉투, 돈방석 같은 굿즈들이다. 그중 일부는 출시 하루 만에 완판됐다.

“올해는 10톤 정도를 굿즈로 해소했는데 앞으로 새로운 제품을 더 많이 만들어 30톤, 50톤까지 끌어올릴 생각입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방식도 도입했다. 모든 과정을 내부에서 처리하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중소기업이 아이디어와 제품을 제안하면 조폐공사가 품질만 관리해 함께 판매하는 ‘오픈 이노베이션’ 모델로 전환한 것이다. 와디즈 같은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도 적극 활용한다. 돈방석·볼펜 등 일부 상품은 와디즈에서 선주문을 받아 수요를 미리 파악하고 MZ세대의 코멘트를 제품 개선에 반영하기로 했다. 공기업에서는 보기 드문 방식이다.
제조사에서 ‘문화·핀테크’로
성 사장은 지난해 “조폐가 산업이 된다”고 선언했다. 1년이 지난 지금, 선언은 성과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화폐 요판화 사업이 있다. 조폐공사만이 구현할 수 있는 고유의 화폐 인쇄 기술로 유명작들을 다시 구현하는 사업이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과 협업해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이중섭의 ‘황소’, 그리고 최근에는 호랑이 민화를 활용한 작품이 나왔다.

“기술이 점점 발전해서 이번에 호랑이 민화 그림은 털을 만져보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예요. 세계 최고 기술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이번 화폐 요판화 ‘맹호도’는 넷플릭스 화제작 ‘케이팝 데몬 헌터스’와 맞물려 큰 호응을 얻었다. 이들 요판화는 한정판·예약 판매로 진행되며 매번 ‘완판’에 가까운 반응을 얻고 있다. 내년에는 ‘붉은 말띠’를 모티브로 한 창작 요판화도 준비 중이다.

현금에서 디지털로의 전환에서도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조폐공사는 온누리상품권·지역사랑상품권 사업의 핵심 플레이어다. 특히 공사 최초로 디지털 온누리상품권 통합운영 사업자로 선정되어 종이뿐 아니라 카드와 모바일 형태의 상품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원래는 지류·카드·QR이 사업자별로 나뉘어 있었지만 이를 통합 시스템으로 묶는 사업을 조폐공사가 수주해 올해 3월부터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 결과 공공 앱 가입자 수가 빠르게 늘었다.

“처음 통합할 때는 가입자가 200만이었는데 지금은 1500만 명 정도입니다. 공공 앱 가운데 가입자가 가장 많은 편이고 코레일 앱이랑 비슷한 수준입니다.”

성 사장은 지역화폐 앱도 ‘통합’이 성공을 좌우한다고 본다. “지자체마다 앱이 따로 있어 220개 앱이 존재합니다. 저희가 맡은 것만 82개고요. 여행객 입장에선 지역마다 앱을 새로 깔아야 해서 불편하죠. 그래서 통합 앱 하나로 여러 지역 화폐를 충전하고 쓸 수 있는 모델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사업은 행정안전부와 각 지자체의 협업이 필수라 속도는 정책 결정에 달려 있다.

해당 사업은 조폐공사의 핵심 성장축이자 확실한 캐시카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온누리상품권과 지역사랑상품권을 합치면 연간 850억원 이상의 매출이 기대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조폐공사는 은행들과 스테이블코인 TF까지 꾸렸다.

“시중은행과 TF를 만들어 함께 작업 중입니다. 실물에서 디지털로 완전히 넘어가는 단계라고 볼 수 있죠.”
“4400억에서 6000억으로” 조폐공사의 반전
조폐공사의 반전은 숫자로 증명된다. 성 사장이 취임했을 당시 조폐공사의 연매출은 5500억원에서 4400억원까지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 매출을 5100억원대로 끌어올렸고 올해는 6000억원 이상이 기대된다. 현금 사용이 급감하고 주화 발행이 사실상 ‘제로’가 된 상황에서 거둔 성과다.

“지폐는 10년 전보다 80% 줄었고 주화는 0입니다. 대한민국이 아마 신규 주화 발행량이 0인 세계 최초 국가일 거예요.”

조폐공사가 찾은 해법은 간단하지만 공기업으로서는 매우 낯선 것이었다. 본업인 ‘돈을 찍는 기술’을 가지고 전혀 다른 산업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조직 분위기도 완전히 달라졌다. 과거에는 “일감이 줄어드는 위기 속에 앞으로 일자리가 유지될 수 있을까”라는 불안이 내부에 팽배했다. 지금은 새로운 사업이 잇따라 생기자 “우선순위를 정해 내실을 다지자”, “리스크가 작은 것부터 선별해 추진하자”는 실무 중심의 논의가 자리 잡았다. 한때 위축됐던 직원들의 자신감도 뚜렷하게 회복된 모습이다.

조직이 바뀐 배경에는 인사 실험도 있다. 성 사장은 취임 직후 공기업에서는 드문 방식으로 민간 출신 간부를 적극 영입했다. ICT 분야에는 LG CNS 출신 임원을 이사급으로 발탁했고 홍보 조직에도 민간 전문가를 데려왔다. 4명뿐인 이사 자리 중 한 자리를 민간에 내준 셈이다.

“글로벌 기업의 DNA를 공기업에 심는 거죠. 그 숫자가 너무 많으면 내부 반발이 생기고 전혀 없으면 조직이 늘어지기 쉽잖아요.”

‘적정 비율’의 민간 영입은 속도·기획·시장 감각을 조직에 자연스럽게 이식했고 직원들도 전문성을 인정하며 변화를 받아들이게 됐다.

외부 인사를 1급(처장급)까지 올린 것도 이례적이다. “보통 외부에서 오면 2~3년 있다가 나가는데 성과가 나면 과감히 승진시켰습니다. ‘외부에서 와도 성과만 나면 승진한다’는 신호를 주고 싶었어요.”

성 사장의 2026년 역점 사업은 ‘한국형 예술형 주화’다. 예술형 주화란 국가 상징물을 주제로 정부 또는 중앙은행에서 금, 은 등 귀금속 소재로 발행하는 법화를 의미한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독수리, 캐나다는 메이플, 호주는 캥거루, 중국은 판다를 새겨 예술형 주화로 판매한다.

“공사의 연간 매출이 약 5000억~6000억원인데 예술형 주화 시장은 기본적으로 조 단위 사업이에요. 이 시장에 해외 6대 주요국이 있는데 미국은 4조9000억원, 중국은 4조3000억원, 캐나다는 3조원 등 연평균 3조원 수준이에요. 시장은 계속 커지고 있죠. 해외 6대 주요국의 전체 매출 규모가 2019년 7조원에서 2022년 20조원으로 늘었으니 150% 이상 성장하는 시장입니다.”

한국의 경우 국가적 행사나 기념일, 역사적 사건 등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주화를 발행하지만 예술형 주화는 없다. 그렇다보니 오히려 세계 주요국에서 외국의 예술형 주화를 역수입해 들여오는 실정이다.

세계 10위권 경제 규모, K팝·K드라마 등 K문화, 유구한 역사 등. 성 사장은 경제대국이자 문화강국으로서 우리나라의 예술형 주화의 잠재력이 매우 클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예술형 주화는 안전자산으로서의 기능도 갖췄다. 안전자산인 금·은 등 귀금속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예술형 주화가 유통될 경우 금 보유량 확대로 국가 안전자산 포트폴리오를 강화할 수 있다.

“최근 프랑스가 2026년 1분기에 예술형 주화 신규 발행을 발표했어요. 한국 또한 비슷한 시기에 진출한다면 국제적 관심을 동시에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 사장은 “프랑스와 충분히 겨룰 만하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조폐공사는 이미 준비가 돼 있습니다. 유럽의 자존심이 프랑스라면 아시아의 자존심은 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붙어볼 만합니다.”

현재 조폐공사는 기획재정부·한국은행 등 관계 기관과 예술형 주화 도입을 심도 있게 검토하고 있으며 내년 초 결실을 목표로 협의를 이어가고 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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