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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키워낸 먹거리…캘리포니아를 요리하다

입력 2025-11-20 17:13   수정 2025-11-21 02:16

무라카미 하루키는 음식 스토리텔러로 유명하다. 그의 글 속에 등장하는 음식을 연구하는 모임과 레시피 책이 나올 정도다. 무라카미에게 음식이란 ‘시간이 걸리지만 그 시간 속에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무언가’다. 현대 사회에서 음식은 먹는 것, 그 이상이다. 때론 폭력, 억압, 강요의 동의어일 때도 있다. 작가 한강이 <채식주의자>에서 거식증 환자를 등장시킨 것이 좋은 예다. 소설 속 주인공에게 음식은 타인이 정해 놓은 규율을 몸으로 밀어 넣는 통로일 뿐이다. 무라카미가 음식과 시간을 연결한 건 ‘패스트푸드’로 상징되는 현대 문명의 폭력성을 인간 본연의 생체 리듬으로 제거하고 싶다는 강력한 열망이다.

‘성스러운 강(江)’이란 의미의 미국 캘리포니아 주도 새크라멘토가 전 세계가 주목하는 ‘슬로푸드의 도시’로 떠오르고 있는 건 꽤 역설적이다. 1986년 이탈리아의 브라에서 출발한 슬로푸드 열풍은 로마 스페인광장에 매장을 만들려는 맥도날드에 대항하면서 시작됐다. 운동의 창립자 카를로 페트리니는 “패스트푸드는 음식의 시간을 파괴하고, 슬로푸드는 인간의 시간을 회복한다”고 했다.

새크라멘토의 ‘팜 투 포크(farm-to-fork·농장에서 식탁까지)’ 행사는 이 도시의 정체성이나 마찬가지다. 도시 반경 100㎞ 안에 농업·축산·와인 산지가 실핏줄처럼 촘촘히 연결돼 있다. 멕시코를 떠나와 3대째 농장을 운영하는 코르케 라모스는 시내에서 20분 떨어진 곳에서 토마토를 기르고, 샌프란시스코 정원사로 일하며 취미로 버섯을 재배하던 브랜드 르넨은 새크라멘토에서 직업 재배사가 됐다. 소련의 침공으로 1980년대 아프가니스탄을 떠나온 무사 아미리는 이곳에서 사프란을 수입해 판매한다. 이들의 재료는 산티아고에 여행을 간 뒤 스페인 음식에 푹 빠져버린 마리아 페레즈의 손에서 황금빛 파에야로 재탄생한다.

농부에서 요리사까지, 이들의 이야기는 촘촘히 엮여 새크라멘토 레스토랑들의 식탁에 오른다. 올해는 이탈리아의 슬로푸드 음식 축제 ‘테라 마드레’가 함께 열려 특별함을 더했다. ‘어머니의 땅’이란 뜻의 테라 마드레 행사가 이탈리아 밖에서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햇살·바람·강 '천혜의 자연'…새크라멘토, 美食의 중심으로
'팜 투 포크의 수도'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
1808년. 스페인인 가브리엘 모라가가 이끄는 탐험대가 지금의 미국 캘리포니아주 내륙에 있는 센트럴밸리 한 강줄기에 당도했다. 탐험대 작가는 이렇게 기록했다. “푸른 물살 양쪽에는 참나무와 미루나무가 드리워져 있고, 그 위에는 포도나무 덩굴이 잔뜩 피었다. 마치 지극히 거룩한 성체(聖體·sacrament)와 같았다.” 그때부터 ‘성체의 강’(rio sacramento)으로 불린 이곳은 농작물을 기르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농지, 캘리포니아 주도 새크라멘토다.

‘요리사의 천국’ 새크라멘토

지난 9월 방문한 새크라멘토 파머스마켓에서는 비옥한 땅의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시장은 현지 농작물을 파는 상인과 주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인파 속으로 걸음을 내딛자 도로 한편에 늘어선 푸드트럭에서 풍기는 향긋한 음식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패티가 숯불 위에서 ‘치이익’ 소리를 내며 훈연 향을 뿜어내고, 공기 중에는 갓 구운 빵의 고소한 냄새와 매콤한 향신료, 진한 커피 향이 기분 좋게 뒤섞였다.

파머스마켓에서 만나는 농작물들은 대부분 인근에서 재배된다. 새크라멘토는 과일부터 견과류, 육·어류까지 거의 모든 식자재를 구할 수 있는 요리사의 천국이다. 센트럴밸리의 너른 들판은 전 세계 아몬드 생산량의 90% 이상을 책임진다. 자포니카 쌀의 세계 3대 생산지이며, 미국 최대 캐비어 양식장이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 토마토, 올리브, 와인 등도 지역 대표 농산물이다.

새크라멘토가 천혜의 농지가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1852년 대홍수 덕분이다. 캘리포니아 등줄기를 따라 내려오는 시에라산맥의 퇴적물이 센트럴밸리로 범람해 토지를 비옥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새크라멘토강과 인근 아메리카강이 만나 풍부한 물줄기를 제공했고, 강한 햇살과 서늘한 저녁은 농작물이 자라기에 최적의 기후를 조성했다.

이민 2세대 농부가 일궈낸 미식 도시

거대한 농지가 미식의 도시로 바뀐 데에는 ‘가벼운 우연’으로 충분했다. 그 시작은 이민 2세대 농부였던 레이 융이었다. 그는 1970년대 초 통조림용 플럼 토마토를 재배하던 중 우연히 지인에게서 동그란 토마토 씨앗을 받아 심었다. 이듬해 밭 전체가 구형 토마토로 가득 차자 그는 처리할 방법을 찾지 못했고, 농산물 배달업체인 프로듀스익스프레스에 떠넘기기 시작했다. 이 토마토가 현지 레스토랑들의 테이블에 오르면서 밭에서 식당으로 농산물을 직접 공급하는 ‘팜 투 포크’ 문화의 시작을 알렸다.

융이 ‘팜(farm)’의 문을 열었다면, ‘포크(fork)’ 문화를 이끈 이는 ‘요리계의 인디애나 존스’ 대릴 코르티였다. 식료품 가게 아들이었던 코르티는 모험심이 강했다. 그는 이탈리아 프랑스 등을 누비며 당시 미국인에게는 생소하던 파마산 치즈, 트러플, 올리브오일, 발사믹 식초 등 식재료를 들여오기 시작했다. 팜만 있던 새크라멘토에 다채로운 캘리포니아식 요리 문화가 자리 잡은 순간이다.

이들의 노력은 2012년 결실을 거뒀다. 미국프로농구(NBA) 선수 출신인 케빈 존슨 전 시장은 그해 새크라멘토를 미국 팜 투 포크 운동의 수도로 선언했다. 새크라멘토 개척 초기 때부터 레스토랑을 운영해온 셀란드 가문 등이 적극 청원한 결과였다.

지역 음식 문화 투어가이드인 헤더 포티스 색타운바이트 대표는 “새크라멘토에는 150만 에이커의 농지가 있어 거의 모든 작물을 재배한다”며 “새크라멘토야말로 지역 농작물을 그대로 맛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고 설명했다.
"패스트푸드와의 싸움…내 요리를 위한 동력"
'슬로푸드' 선호하는 포크너 셰프
미식의 성지 이탈리아 토리노의 상징인 슬로푸드 축제 ‘테라 마드레(terra madre)’가 올해는 미국 새크라멘토 시내를 달궜다. 어머니의 땅이라는 뜻의 테라 마드레는 토리노에서 시작됐지만 올해부터 이탈리아와 미국에서 격년으로 열린다. 전시장에서는 세계 최고의 와인 생산지인 캘리포니아주 나파 와이너리, 미국 최고 셰프들이 찾는 오리 농장인 서노마 카운티의 ‘리버티 덕’ 등 75개 공급업체가 식재료를 선보였다. 유명 셰프와 식도락가들은 곳곳에서 슬로푸드의 맛을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테라 마드레 행사의 백미는 행사 둘째 날 스타 셰프 엘리자베스 포크너(사진)가 진행한 시식회였다. 그는 미국 유명 요리 경연 프로그램인 ‘아이언 셰프 아메리카’ ‘탑 셰프’ 등에 단골 출연한 유명 셰프다. 35년 경력의 베테랑 셰프인 그는 국경과 장르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메뉴를 선보이며 참가자들의 미각을 사로잡았다.

애피타이저는 볶은 청경채를 곁들인 사천식 마라소스 두부 요리.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포크너 셰프가 중국에 머물며 얻은 영감이 접시 위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어 메인 요리로 브라운버터로 구운 도다리와 유카가 준비됐다. 포크너 셰프는 이날 행사를 위해 시애틀에서 제철 도다리를 공수해왔다. 대추야자 증류주로 만든 셰이크는 달콤한 여운을 남겼다.

시식회 후 한국경제신문과 만난 포크너 셰프는 “내게 가장 무서운 존재는 패스트푸드”라고 토로했다. 그는 “아이들에게 ‘건강에 좋고 신선한 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자’고 해도 돌아오는 답변은 늘 ‘인앤아웃 햄버거 먹으러 가자’라는 투정”이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포크너 셰프는 “패스트푸드와의 싸움은 곧 나의 요리를 지속하는 동력”이라고 했다.

세계적 셰프인 포크너는 각국을 여행하며 현지에서 재료를 조달한다. 그는 “현지 농부와 어부는 어떤 재료가 제철인지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라며 “이들을 직접 찾아가 확인하는 과정이야말로 요리의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새크라멘토=김인엽 특파원 insid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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