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내년 3월 시행되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 이른바 ‘노란봉투법’ 후속 조치로 하청노조의 원청 상대 독자적인 교섭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시행령 개정안을 내놨다. 기업별 노사 중심의 기존 교섭 질서가 사실상 해체되면서 산업현장의 교섭 구조가 전면 재편되는 ‘전환점’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개정 노동조합법에 따른 교섭 절차를 규정하는 이번 시행령은 하청노조가 원청노조와 별개로 원청과 직접 교섭할 수 있도록 교섭단위 '분리'를 허용하는 내용이 골자다. 현행 노동조합법에 따르면 하나의 사업장에 복수 노조가 있는 경우 사용자와의 교섭 창구를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 2010년 '교섭창구 단일화'라는 이름으로 노조법에 도입된 이 제도는 사업주가 사업장 내 여러 노조와 교섭을 반복·중복하면서 빚어지는 혼선이나 교섭 비용 증가를 막기 위해 도입됐다.
문제는 노동조합법이 개정되면서 하청 노조까지 원청을 상대로 교섭이 가능해지면서, 원청 노조와 하청 노조 사이에 창구 단일화를 어떻게 할지 공백 상태였다. 노조법 개정 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상황이 현실화하면서 기존 '단일화 제도'를 어떻게 적용할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간 노동계에서는 "창구 단일화 제도를 폐지하고 개별 하청 노조들이 원청과 각각 교섭을 할 수 있게 열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경영계는 "교섭창구 단일화까지 폐지할 경우 자칫 수백개 하청 노조와 일일이 교섭을 하는 상황이 빚어질 수 있다"며 우려를 나타내 왔다.
입법 예고된 시행령에 따르면 고용노동부는 일단 현행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의 틀은 유지한다. 하지만 하청노조가 원청노조와 창구 단일화를 원하지 않을 경우 교섭 창구를 '분리'해 원청과 직접 교섭할 수 있게 허용한다. 한발 더 나아가 아예 '원칙적으로' 원청노조와 하청노조 간 교섭단위를 분리한다는 입장이다. 만약 하청노조가 교섭단위 분리 신청을 하지 않는다면 원청노조와 하청노조가 연대해 교섭하도록 정부가 지도할 계획이다. 사실상 하청 노동조합에게 교섭을 분리할지를 두고 '선택권'을 준 셈이다.
이를 위해 교섭단위 분리 기준도 시행령을 통해 새로 도입했다. 원래 현행 노동조합법과 법원 판례에 따라 교섭단위 분리는 △근로조건의 현격한 차이 △고용형태 차이 △별도 교섭 관행이 있는 경우 등 엄격한 요건을 갖춘 경우 매우 예외적으로 인정해 왔다. 하지만 개정 시행령은 노조의 조직범위, 이해관계 공통성, 타 노조에 의한 이익대표의 적절성, 갈등 가능성, 당사자 의사 등 요건을 대거 추가해 하청 노조의 상황에 따라 분리가 가능하도록 문턱을 낮췄다. 일각에서는 “하위법령인 시행령을 통해 교섭창구 단일화 원칙을 규정한 상위 법률(노동조합법) 취지를 정면으로 뒤집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정부는 하청노조의 교섭요구에 대해 원청이 “실질적 지배력이 없어서 사용자가 아니다”라며 응하지 않아 절차가 지연될 것을 대비해 노동위원회가 '실질적 지배력'이 있는지를 사전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실질적 지배력이 있다고 판단했는데도 원청이 교섭에 응하지 않는다면 부당노동행위 등 사법처리 절차를 통해 원청 사업주를 교섭테이블로 끌어낼 방침이다. 노동위는 교섭단위 분리 심사 과정에서 △원청·하청 노조 간 교섭 분리 필요성 △하청 노조 간 교섭분리 여부와 방법 △원청의 사용자성 등을 사전에 판단하는 핵심 권한을 갖게되는 셈이다.
문제는 하청 노조들이 독자 교섭을 원해 분리신청을 할 경우 원청이 다수의 하청 노조들과 일일이 교섭해야 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수십·수백개의 하청이 있는 경우 자칫 교섭이 무제한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광선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사실상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를 무너뜨리게 된 것"이라며 "원청이 1년 내내 하청 노조들과 교섭만 하다 끝날 수 있다는 경영계의 우려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경총도 "모법(노동조합법)의 위임 범위를 넘어서 무분별하게 교섭단위 분리 결정기준을 확대할 경우, 15년간 유지되어온 원청단위의 교섭창구단일화가 형해화되어 산업현장의 막대한 혼란이 우려되는 만큼 무분별하게 교섭단위 분리 결정기준을 확대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반면 노동계는 시행령이 기대에 부합하지 못하는 '반쪽짜리'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아예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를 폐지해 하청노조가 각각 원청에 교섭을 요청할 수 있도록 허용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민주노총 산별노조들은 24일 성명서를 내 ”교섭창구 단일화라는 악질 제도를 유지해 하청노조의 교섭권 보장에 장애물을 만들었다“고 성토했다.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은 “노동자는 다시 노동위·법원을 전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행령을 통해 교섭단위 분리의 문턱을 낮춰도 막상 법원에 가면 결국 분리가 어려울 것이란 볼멘 소리도 나온다. 민주노총 하청노조 관계자는 "교섭단위 분리는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엄격하게 인정한다는 게 법원의 확고한 입장"이라며 "법률이 아닌 정부 시행령을 바꿨다고 하루아침에 법원이 분리를 쉽게 인정해 줄지는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사업주가 소송으로 향하면 시행령에 따른 정ㅈ부의 분리 방침이 공수표가 될 수 있다는 우려다.
한 공인노무사는 “교섭단위 분리 신청이나 사용자성 판단에 대한 이의제기가 교섭 시즌만 되면 반복 제기될 여지가 커 절차가 매번 지연될 것”이라며 "노조가 생성 소멸을 반복하고 상황은 변하는데, 그 수많은 절차를 노동위에서 일일이 판단 받고 규율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정부는 향후 시행 준비 기간 동안 노사·전문가 의견을 반영한 세부 매뉴얼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김 장관은 “12월 초부터는 노사와 협의하여 연내 지침·매뉴얼을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김 장관은 "개정 노동조합법의 새로운 사용자 정의규정을 기준으로 하여 사용자성 판단기준 지침을 마련하겠다"며 "사용자성 판단기준 지침에는 근로조건에 대한 실질적·구체적 지배·결정 여부의 판단기준 및 사용자성 인정 범위와, 이에 대한 예시 사례 등을 담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개정 노동조합법에서 노동쟁의의 정의가 변경됨에 따라 노동쟁의 범위 지침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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