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연기에 대해 열정을 불태웠던 배우 고(故) 이순재는 다작한 배우로서 연기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자주 드러냈다.
25일 새벽 세상을 떠난 배우 이순재는 고령에도 철저한 건강 관리를 자랑하며 방송, 영화, 연극 등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연기 활동을 펼쳤다.
고인은 2018년 영화 '덕구'에 출연하면서 "별의별 종류의 영화에 다 출연해봤다. 주연도, 단역도, 악역도, 멜로 연기도 다 해봤다"라며 "배우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무조건 작품 그 자체"라고 강조했다.
2008년 모교 서울대에서 열린 관악초청강연에 연사로 나서서는 "지금도 연기를 잘 선택했다고 생각한다"며 "나를 다 털어내고 평가받아서 수익을 올리는 거라 일단 남에게 피해를 안 끼친다. 또 정년이 없다"고 웃음기 섞인 진심을 내비쳤다.
누구보다 책임감 강한 연기자였던 고인은 죽기 직전까지 무대에 서고 싶다는 의지와 배우로서의 소명 의식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2018년 TV조선 '스타다큐 마이웨이'에 출연해 "대사를 외울 수 있을 때까지는 연기하고 싶다. 매 작품이 유작이라는 생각으로 임한다"고 밝혔다. 2023년 같은 방송에 출연해서도 "내 소망은 무대에서 쓰러지는 것이다. 그게 가장 행복한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방영된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록'에서는 "조건이 허락된다면 가장 행복한 것은 공연하다 죽는 것이다. 무대에서 쓰러져 죽는 것이 가장 행복한 죽음"이라는 소신을 밝혔다.
그는 2008년 모친상을 당한 뒤 연극 '라이프 인 더 씨어터' 무대에 오르면서 "관객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공연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2011년 한 배우의 드라마 중도 하차가 논란이 되자 "어떤 이유에서든지 현장을 떠날 수가 없는 것이 우리의 조건이다. 배우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현장을 지켜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원로 배우로서 드라마 업계의 잘못된 관행과 상업주의를 꼬집는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이순재는 2010년 MBC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 종방연에서 "작업 과정은 지옥이었다. 젊은 친구들이 생사를 걸고 한 작품"이라며 "이제는 완전한 사전제작제로 들어가야 한다"고 작심 발언을 내놨다.
이듬해 MBC 드라마 '마이 프린세스'가 이른바 '쪽대본' 논란에 휩싸이자 "어느 나라가 이렇게 드라마를 만드느냐"며 "외주제작을 의뢰할 때 적어도 열흘 전에 대본을 넘겨 검사할 시간을 달라는 계약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2023년 tvN 단막극 시리즈 '오프닝' 제작발표회에서는 "드라마는 감동이 우선, 그다음이 재미"라며 "젊은이들을 위해 생각할 거리가 있는 드라마를 좀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가족들이 둘러앉아 다 같이 볼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면 시청자들은 돌아온다"고 조언했다.
후배 연기자들에게는 엄격한 선배이자 멘토였다. 그는 "배우들이 한 단계 뚫고 더 올라가려는 노력이 있어야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할 수 있다"며 "만날 깔끔하게 멋 내는 게 배우가 아니라 역할을 위해 항상 변신하는 게 배우"라고 강조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한때 정계에 입문했지만 "정치 생활 8년간 단 한 번도 행복하지 않았다. 나의 길은 연기라고 생각했다. 나에겐 연기밖에 없었다"고 돌아봤다.
마지막으로 공식 석상에서 남긴 수상 소감도 화제를 모았다. 그는 지난해 12월 31일 KBS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받은 뒤 "오래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온다"며 "보고 계실 시청자 여러분께 평생 신세 많이 지고 도움 많이 받았다고 말하고 싶다"고 감격에 젖은 소감을 밝혀 보는 이들에게 울림을 줬다.
이날 새벽 91세를 일기로 별세한 고인은 1934년 11월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철학과 재학 중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했다.
이후 1960년 KBS 1기 공채 탤런트에 발탁된 뒤 '나도 인간이 되련다', '사모곡', '풍운', '보통 사람들', '동의보감',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 '허준', '상도', '내 사랑 누굴까', '이산', '엄마가 뿔났다', '베토벤 바이러스', '공주의 남자', '돈꽃', '개소리' 등의 드라마에 출연했다.
이순재는 연극 무대에도 올랐다. 데뷔작 '지평선 너머'를 시작으로 '로미오와 줄리엣', '청기와집', '말괄량이 길들이기', '베게트', '우리 읍내', '춘향전', '빠담빠담빠담', '세일즈맨의 죽음', '돈키호테', '앙리 할아버지와 나', '그대를 사랑합니다', '리어왕' 등에 참여하는 등 꾸준히 다작하며 배우로서 존재감을 발산했다.
또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지붕뚫고 하이킥'으로 이어지는 '하이킥' 시리즈와 예능 '꽃보다 할배'에 출연하며 대중에게 친숙한 이미지로 다가가기도 했다.
이순재는 1991년 정계에 입문한 뒤 1992년 14대 총선에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서울 중랑 갑 지역구에서 당선,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했다.
최수진 한경닷컴 기자 naiv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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