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년 이맘때면 미디어들이 가장 많이 다루는 주제가 '내년의 트렌드'다. 최근에는 디자인, 정보기술(IT), 사용자경험(UX), 유통 등 분야별로 세분되는 경향이 짙어졌다. 그만큼 산업별, 상황별로 좀 더 유연한 인사이트가 필요해졌다는 얘기다. 물론 수많은 트렌드 중 더욱 경향성이 짙은 이슈를 선별해내는 능력, 개인의 취향에 맞는 트렌드를 골라내는 소비자의 감각도 필요하다.
공간은 어떨까. 코로나 팬데믹 이후 집안을 취향에 맞게 가꾸려는 수요는 국내에서도 크게 늘었다. 트렌디하면서도 개성을 담은 나만의 공간을 연출하려는 소비자들이 증가했다. 특히 인공지능(AI)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시대가 되면서 집안을 따스한 감성이 넘치는 공간으로 꾸미려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좀 더 감성적 경험을 통해 안정감을 느끼고 싶어 한다는 것.
가장 크게 공간을 달리 꾸밀 수 있는 방법은 색상이다. 벽에 새로운 페인트를 칠하거나 벽지를 바르는 것만으로도 공간 자체가 확 달라질 수 있다.
페인트 전문 기업 벤저민 무어는 2026년 컬러로 ‘실루엣’을 선정했다. 실루엣은 에스프레소 컬러에 목탄 질감이 섞인 컬러다. 인공적이지 않으며 클래식한 톤을 가지고 있다. 벤저민 무어는 이에 대해 "클래식한 제품과 전통적 디자인이 갖는 편안함과 안정감에서 기인한 결과"라고 설명한다.

매년 컬러 키워드를 선정하는 페인트 기업들의 2026년 트렌드 컬러도 이와 맥락은 비슷하다. 미국 색채 전문 기업 팬톤은 2026년의 컬러로 ‘트랜스포머티브 틸’을 꼽았다.
매년 팬톤이 선정하는 ‘올해의 컬러’는 디자인과 문화예술, 산업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트랜스포머티브 틸은 블루와 그린이 섞인 짙은 청록 계열로, 소재나 빛 등 다양한 외부 자연 요소에 의해 변화무쌍한 느낌을 준다. 자연에서 볼 법한 신비한 인상과 안정감 있는 무드, 외부 요소에 의해 여러 이미지로 변신한다는 점에서 무한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페인트 전문기업 C2는 골드와 황톳빛을 닮은 ‘에페르네’ 컬러를, 베어는 회색빛과 차분한 청록색을 섞은 ‘히든젬’ 등을 선정했다. 대체로 자연의 색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흙이나 나무, 특정 열매를 연상케 하는 색상들이다. 집 안 가구들과도 조화롭게 어울린다. 빠르고 트렌디한 변화 속에서 더욱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공간을 원하는 심리가 반영돼있다는 분석이다.

가구도 감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올해 온라인 가구 리테일러들의 데이터에 따르면 ‘가볍고’ ‘부드러우며’ ‘편안하고’ ‘자연스러운’이라는 키워드가 상위를 차지했다. 이는 트렌드 분석 기업 WGSN이 조사한 결과로, 유연하고 곡선적인 디자인, 자연 친화적인 소재 등에 사람들이 주목하게 될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는 원시적 디자인, 가공하지 않은 날 것, 소재가 그대로 과감하게 드러나는 마감을 특징으로 하는 '브루탈리즘' 디자인의 인기와도 연결된다. 이런 흐름은 가구를 보다 오래, 지속해서 사용하고 싶어 하는 소비자의 니즈와 함께 컬러나 소재의 다채로운 플레이보다는 인위적이지 않은 디자인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예술과 가구의 경계는 이미 흐릿해졌다. 일찍이 루이비통이나 로에베 등의 패션 브랜드들이 리빙 영역으로 확장하면서 가구와 오브제를 아트피스로 바라보는 시선은 보다 대중화했다. 작가들 또한 작품과 제품의 영역을 자연스럽게 융합하는 경향을 보인다.
여기서 한층 차별화된 요소를 원하는 소비자들은 장인정신을 담은 희소성 있는 오브제에 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는 공간에 중요한 포인트가 되어주는 그림이나 조각 등의 영역으로도 확장된다. 프리즈나 키아프 같은 아트페어의 성장 또한 이를 방증한다. 패션이나 리빙 브랜드가 지역적 특색을 반영한 공예 작품을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선보이거나 관련 전시를 개최하고, 장인들과의 협업 오브제를 지속해서 만드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유명인이 쓰기 때문이 아니라 특별한 스토리, 소비자 자신의 판단에 의해 선택하는 게 더 의미 있는 소비로 여겨지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경영지원센터 자료에 따르면 2022년 프리즈가 서울에 진출한 이후 2023년 매출 기준 국내 미술시장 규모는 1조377억원까지 성장했다. 그런가 하면 올해 열린 프리즈 아트페어에서는 4년간 열린 행사 중 사상 최고가 판매작이 나오기도 했다.
과거로의 회귀, 레트로에 대한 선망은 공간에도 반영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답습이 아니다. 레트로한 요소는 안락한 집에 대한 욕구, 익숙한 듯 새로운 아이템으로 인식되는 새로운 스타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025 밀라노 디자인 위크를 분석한 트렌드북을 살펴보면 새로운 럭셔리는 ‘믹스(Mix)’에 있다. 현대적인 가구에 레트로한 포인트를 주거나 러스티한 질감에 금속 마감을 더 하고 패턴 플레이를 조합하는 공간이 새롭고 눈길이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앞으로의 트렌드 역시 세부적인 기능과 디자인은 공간별로 명확히 분할될 것으로 보인다. 2025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주목받은 공간 중에는 천장도 있었다. 특히 천장 조명이 다른 조명보다 많은 관심을 받았다.
천장 조명은 공간의 온도와 컬러를 좌우하는 것은 물론 오브제로도 그 역할을 충분히 한다. 테이블 조명이나 플로어 조명과 다르게 천장 조명은 공간의 인상을 결정하는 주요 요소가 되기 때문에 그동안 무난하고 클래식한 아이템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미국 유명 건축 매거진 'AD'의 표현을 빌리면 천장의 조명은 ‘마치 하나의 작품’처럼, ‘당신의 방을 위한 주얼리’처럼 기능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조도나 컬러를 아예 맞춤형으로 주문하는 사례도 많아지며 천장의 조명이 공간의 주요한 아트피스 겸 기술의 집약체가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디자인이나 소재가 감성적으로 향한다면 기술은 보다 정교하고 지능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앞으로는 시간대에 따라 조명과 온도, 음악까지 제어하는 시스템은 물론 벽에 내장된 사운드 장치, 패널 뒤에 숨겨진 가전제품, 먼지와 오염을 막는 소재 등 공간 곳곳에 숨겨진 기술적 장치들이 보편화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는 미국 최대 규모의 주거용 부동산 플랫폼 '질로우'의 분석이다.
이미 손대지 않고 열고 닫히는 블라인드를 경험한 소비자들은 일일이 손을 사용해야 하는 블라인드에는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것이 원래 필요했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진짜 기술은 사용자가 미처 인지하기도 전에 사용 경험을 바꿔놓는 법이니까. 설계 단계에서부터 공간 사용의 디테일한 UX 디자인이 시스템화되는 ‘토털 솔루션’ 개념은 발달하는 기술을 만나 더욱 진화할 것으로 보인다.
오상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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