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이 들린 방향으로 CCTV가 순식간에 고개를 돌린다. CCTV에 달린 작은 칩이 두뇌 역할을 한 결과다. 배터리 시스템의 설계도면을 학습한 인공지능(AI)은 제품 성능 고도화를 위해 설계도를 끊임없이 재해석한다. 제조 최적화를 위한 공정 설계도까지 그려낸다. 신발 디자이너의 디자인 콘셉트를 학습한 생성형 AI는 수십 개의 디자인을 쏟아내고 디자이너의 선택을 기다린다.부산 지역 제조 현장에서 특화 AI를 개발하고 선점하기 위한 작업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온디바이스·피지컬·버티컬 AI 등 현장의 기업들은 제조 특성에 따라 다양한 AI 기술을 채택했다. 개발에 성공하면 제조업에 미칠 파급력은 상당히 클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박형준 부산시장은 “세계 최고 수준의 물류 인프라와 거대 제조 단지를 둔 부산 산업에 AX(AI 전환)는 필수적”이라며 “전통 제조업 특성에 맞는 다양한 AI 프로젝트를 발굴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성우하이텍은 배터리 시스템의 핵심인 설계 해석을 AI가 대체하고, 이를 바탕으로 제조를 위한 디지털트윈을 구성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사실상 배터리 시스템 설계와 이 설계안을 바탕으로 한 제조 공정 설계까지 AI가 맡게 되는 셈이다.
성우하이텍은 2019년 전기자동차 관련 부서를 신설한 뒤 전기차 배터리팩 케이스를 양산했다. 배터리 시스템 개발에도 매진해 2027년 배터리 시스템 양산을 앞두고 있다. 20개 차종의 배터리 시스템 개발을 진행해 AI가 학습할 설계 해석 데이터를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는 부품을 넘어 시스템을 AI가 설계한다는 점에서 제조업계에 주는 파급력이 크다는 게 성우하이텍 측의 설명이다. 배터리 시스템만 하더라도 배터리 셀을 비롯해 10여 개의 모듈이 들어간다. 부품으로 따지면 수백 개에 이른다. 지금까지 부품 하나하나의 설계 해석을 엔지니어가 했다면, 앞으로는 AI 에이전트가 이를 대체한다.
이렇게 되면 AI가 스스로 설계를 평가하고 해석해 피드백을 내놓은 뒤 실행을 반복하는 구조가 구축된다. 이 과정이 완성되면 디지털트윈 기반의 통합 플랫폼 개발에 들어간다. 성우하이텍 관계자는 “부품 간의 복잡한 작동 메커니즘을 AI를 통해 자동으로 설계하고 개발하는 작업”이라며 “이번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면 선박 부품 등 모듈화·시스템화가 진행 중인 제조업 전반에 상당한 파급력을 가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감바랩스는 초경량 AI 모델을 개발했다. 노트북과 스마트폰처럼 통신이 필요한 장비 대신 냉장고 등 가전과 같은 장비에 AI를 적용하는 온디바이스 AI 개발 기업이다. 초경량 AI 모델이어서 클라우드 서버 대신 작은 칩 하나로 충분히 연산이 가능하다.
감바랩스의 AI 기능은 탐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화자를 구분하고 소리가 들린 방향을 가려내는 기술이다. 사용하는 언어 모델도 특정 상황을 감안하므로 대규모언어모델(LLM) 대신 소규모언어모델(SLM)을 적용한다. 따라서 특정 상황에 유용하게 AI를 활용할 수 있다. CCTV가 대표적인 사례다. 개인정보보호법상 CCTV로는 소리를 수집할 수 없다. 감바랩스는 국내 CCTV 제조 기업과 함께 초경량 AI를 적용한 칩을 활용해 “살려줘”와 같은 위급 상황을 알리는 소리를 인지한 뒤 곧바로 CCTV가 고개를 돌리는 기술을 개발했다. 소리 수집 없이 방향만 파악하므로 모니터링 요원이 대응할 수 있다. 이 제품은 다음달 양산을 앞두고 있다.
제조업에도 활용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이미 감바랩스는 국내 로봇 관련 기업과 액추에이터 불량 검사 시스템을 개발했다. 마찬가지로 소리를 탐지하는 AI가 달린 칩을 액추에이터에 단 뒤 가동하는 것이다. AI는 액추에이터의 소리와 진동을 분석해 불량품과 양품을 가린다. 기존에는 직원이 청진기를 대고 시험했다. 박세진 감바랩스 대표는 “목적과 상황을 특정해 그에 맞춰 성능이 매우 높은 초경량 AI를 개발하고 있다”며 “가전은 도입을 앞두고 있고, 잠재적으로는 스마트팩토리와 같은 제조업 분야에도 활용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부산이 한때 글로벌 시장을 주름잡았던 신발 제조업 분야에서도 AI 기반의 변화가 감지된다. 지난달 열린 ‘패패부산’ 전시회의 주인공은 신발 및 패션 브랜드가 아니라 AI 플랫폼 스타트업 크리스틴컴퍼니였다. 전시장 메인 부스에 AI가 만든 영상이 송출되고 있었다. 하얀 신발을 신은 이민봉 크리스틴컴퍼니 대표의 영상이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AI가 신발을 디자인하고, 실제 착용을 가장한 홍보 영상과 이미지까지 만들어 낸다. 이날 크리스틴컴퍼니가 발표한 신발은 지역 아웃도어 브랜드 트렉스타와의 합작품으로, 30~40대도 신을 수 있는 디자인의 파크골프화였다. 크리스틴컴퍼니는 AI를 통해 생성한 디자인 이미지를 SNS에 올려 소비자 반응까지 살피는 등의 실험을 진행했다.
크리스틴컴퍼니의 목표는 부산을 국내외 신발 제조의 컨트롤타워로 만드는 것이다. 이미 플랫폼을 만든 AI 제조 공장 추천 플랫폼을 연결해 국내외 신발 디자이너가 신발을 디자인한 뒤 고부가가치 제품은 한국 공장을, 저가 제품은 중국과 베트남 공장을 선택하도록 유도한다는 구상이다. 베트남과 중국 공장 데이터를 제조 플랫폼에 등록 중이며, 국내외 명품 브랜드가 디자인 플랫폼을 활용하고 있다.
이 대표는 “생성형 AI 기반의 디자인 플랫폼으로 신발 기획과 디자인이 간편해졌다”며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기업은 ODM(제조업자개발생산) 기업으로 발전할 수 있고, 신발 디자이너 고령화라는 지역 신발산업의 문제점까지 해결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부산=민건태 기자 mink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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