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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비통과 오르세 넘나드는 로랑 그라소…낙원의 뒷면을 그리다

입력 2025-11-26 18:46   수정 2025-11-26 18:47

고요한 수면 위, 하늘로 치솟은 불기둥이 활활 불타고 있다. 하늘은 붉은 석양으로 물들고, 사람의 손길이 아직 닿지 않은 듯한 미지의 세계는 현실과 허상, 자연과 인공 그 경계에 서 있는 듯하다. 대전 헤레디움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프랑스 예술가 로랑 그라소(53)의 ‘과거에 대한 연구’(Studies into the Past) 시리즈 중 한 장면이다.



이 작품은 올해 초 루이비통의 봄·여름(S/S) 컬렉션 런웨이에 등장했다. 상상과 직관이 어우러진 자연의 풍경을 그린 그의 작품이 루이비통 티셔츠와 가방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지난해 가을엔 불가리도 그라소와 협업한 럭셔리 워치 ‘옥토 피니씨모’ 컬렉션을 출시하기도 했다.



그라소는 매체와 분야의 경계를 허무는 작가다. 영상, 회화, 조각 등 여러 매체를 넘나들고,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예술과 상업의 경계를 무색하게 만든다. 그는 이러한 작업으로 마르세 뒤샹상(2008년)과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2015년)을 받았다. 퐁피두센터, 오르세미술관 등 세계적인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최근 개인전을 위해 한국을 찾은 그는 “‘창작’이란 본질을 유지한다면, 예술은 언제나 협업에 열려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border:1px solid #c3c3c3" />
패션쇼는 하나의 예술 프로젝트

▷수많은 상업 브랜드와 협업하셨습니다.

“한국에서 특히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사실은 놀랍습니다. 예술에 있어서 다른 영역과의 협업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예술은 성화(聖畵)를 통해 교회와 협업했죠. 메디치 가문도 수많은 예술가를 후원하며 여러 작품을 주문했고요.”

▷예술과 브랜드가 공유하는 지점은 무엇인가요.

“정확히는 브랜드가 아닌 브랜드의 아티스틱 디렉터와 협업하는 것입니다. 이건 단순한 마케팅이 아닙니다. 마케팅의 언어는 예술가의 언어와 소통하기 어렵습니다. 그것보다는 ‘창작’이란 본질에 집중해야 합니다. 예술과 브랜드 간 협업은 창작자끼리 만나 서로의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것이죠.”



▷루이비통 디렉터와의 호흡은 어땠나요.

“니콜라 제스키에르(루이비통 여성복 아티스틱 디렉터)와는 공통 관심사가 많습니다. 우리 모두 특정한 장소에 켜켜이 쌓인 역사, 그로 인해 느껴지는 신비로운 분위기와 강렬한 힘에 관심이 많죠. 그런 장소에 가는 것은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스키에르와는 많은 대화를 하지 않아도 서로가 뭘 좋아하는지 알고 있죠.”

▷그래서 협업을 결정하게 됐나요.

“올해 초 그가 제 작품을 모티브로 가방과 티셔츠, 포스터를 제작했습니다. 제 작품을 온전하게 쓸 수 있도록 허락한 건 그에게 완벽한 신뢰를 하고 있기 때문이죠. 제스키에르는 그야말로 천재입니다. 그의 패션쇼를 보면 하나의 전시이자, 하나의 영화이자, 하나의 완벽한 예술 프로젝트라는 생각이 들죠.”

이상화된 자연에 숨은 모호성

▷이번 전시에 등장한 영상 작품 ‘오키드 아일랜드’를 통해서 장소성에 대한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오키드 아일랜드는 대만에 실재하는 ‘란위섬’을 배경으로 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이상적인 낙원 같지만, 사실 원주민이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침략당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이죠. 섬 한켠에 원주민의 허락 없이 핵폐기물 저장소를 만들기도 했고요. 저는 이처럼 ‘이상화된 자연’ 뒤에 있는 불안, 혼란, 위협을 직사각형 모양의 물체를 통해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관객들은 정체 미상의 검은 물체를 보며 불안함을 느끼게 되죠.”



▷이상화된 자연이란 말이 인상적입니다.

“보통 서양화에 등장하는 섬은 완벽한 천국과 낙원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것과는 거리와 멀죠. 훨씬 거칠고 힘듭니다. 저는 이런 ‘불안한 낙원’이란 역설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허구인지 알 수 없고, 빙하에서 불길이 솟구쳐 나오는 역설적 장면을 통해 경계의 모호성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개인전 장소로 헤레디움을 택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인가요.

“2년 전 페로탕 개인전을 열 때 대전 헤레디움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헤레디움이 지닌 역사와 장소성이 제가 다루는 주제와 연결된다고 느꼈죠. (헤레디움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토지 수탈 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 건물을 복원해 만든 복합문화공간이다.)”

숲을 산책하듯 감상했으면

▷이번에 새롭게 시도한 게 있나요.

“이번 전시에서 두 개의 삼면화(세 개의 그림으로 이뤄진 작품)를 선보였는데, 제게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이전에 전남도립미술관 전시에서도 한국화에 저만의 요소를 넣어 재해석하는 시도를 했는데, 이렇게 새로운 창작의 영역을 계속 발견해 나가는 과정이 매우 즐겁습니다.”



▷한국에 대한 작품 계획도 있나요.

“아직 구체적인 제안을 받지 않았지만, 만약 만들게 된다면 충분한 조사나 연구를 거쳐서 할 겁니다. 다만 DMZ처럼 명백한 폭력의 장소보다는 눈에 잘 보이지 않고, 덜 명백한 폭력에 대해 다루고 싶습니다. 예컨대 민주주의의 폭력 같은 것이요. 그게 우리에겐 더 큰 위협이라고 생각합니다.”

▷관람객에게 어떤 전시로 다가가고 싶나요.

“관람객이 꼭 작품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딱히 도와줄 필요도 없고요. 관람객은 충분히 영리해서 자신의 말로 작품을 이해하고, 표현하면 됩니다. 제 전시에선 관람객이 숲을 산책하는 느낌을 받았으면 합니다. 숲에서 나무와 풀을 볼 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지 않고, 편안하게 보는 것처럼요. 초현실적인 상상의 풍경 속에서 그저 산책하듯이 거닐면 됩니다.”

이선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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