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롯데그룹이 1년 만에 또다시 칼을 빼들었다. 지난해 유동성 위기설을 진화하기 위해 역대급 쇄신 인사를 단행한 데 이어 올해 부회장단 4명을 전원 용퇴시키고, 사업군별 컨트롤타워인 HQ(헤드쿼터)를 폐지하는 초강수를 뒀다. “위기는 끝나지 않았고, 성과도 충분치 않았다”는 신동빈 롯데 회장의 불만과 위기의식이 반영된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롯데그룹 인사 전체 명단은 A33면
롯데 내부 인사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롯데지주 공동대표에 오른 고정욱 사장과 노준형 사장은 각각 재무혁신실장과 경영혁신실장을 맡아온 ‘실무형 컨트롤타워’다. 두 사람 모두 오랫동안 롯데그룹 기획조정·사업구조조정의 현장을 경험한 인물이다. 롯데는 HQ를 없애는 대신 지주 내부의 재무와 전략 조직을 강화하고, 각 계열사 이사회에 책임을 이관했다. 화학군에는 HQ 대신 PSO(Portfolio Strategy Office)란 조직을 뒀지만, 이 또한 컨트롤타워가 아니라 기능 조직에 가깝다.
유통 부문의 최고경영자(CEO) 인사 폭이 특히 컸다. 외부 출신으로 상징성이 컸던 김상현 부회장과 정준호 사장이 물러난 자리에 백화점, 마트, e커머스 내부 인사를 채워 넣었다. 백화점 대표에 내정된 정현석 부사장은 롯데백화점 영업전략, 점포장을 거쳐 유니클로의 한국 운영사인 에프알엘코리아를 맡아 구조조정과 실적 회복을 이끈 ‘실무형 롯데맨’이다.
마트·슈퍼 대표를 맡게 된 차우철 사장은 롯데제과와 정책본부, 지주 경영개선 1팀장을 거쳐 롯데GRS 대표를 맡아 수익성 개선과 글로벌 사업 확장을 추진해 성과를 냈다. e커머스 대표로 승진한 추대식 전무는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e커머스 사업부 구조조정과 턴어라운드 전략을 짜온 ‘현장형 기획통’이다.
건설과 화학 부문에서도 내부 출신을 중용했다. PF 위기와 분양 부진으로 부담이 큰 롯데건설 대표에는 개발 사업과 자산 관리 등을 맡아 성과를 낸 오일근 부사장을 선임했다. 화학군은 롯데지에스화학, LC USA 등 주요 법인 대표를 교체해 사업 포트폴리오 전환에 속도를 낸다. 지난해 화학군 CEO 10명을 한꺼번에 바꿨음에도 실적 개선이 더디자 올해는 아예 조직의 틀 자체를 바꿨다.
그로부터 1년 뒤 신 회장의 평가는 냉정했다. 무엇보다 실적과 체질 개선 속도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화학과 건설의 재무 부담은 여전히 그룹의 발목을 잡고 있고, 유통과 식품 역시 구조조정과 점포 효율화에도 불구하고 성장동력이 약해졌다. HQ로 대표되는 ‘중간 컨트롤타워’ 구조가 현장 실행력을 떨어뜨린다는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신 회장은 지난 9년간 유지해온 사업총괄 체제를 접고, 부회장단까지 정리하는 선택을 했다.
롯데는 지난 몇 년간 도입한 직무 기반 인적자원(HR) 제도를 이번 임원 인사에도 그대로 적용했다고 강조했다. 신임 임원 81명 가운데 인공지능(AI), 마케팅, 투자, 개발 등 각 영역에서 실무 성과를 낸 팀장급과 실장급이 다수 포함됐다. 황형서 롯데 e커머스 마케팅부문장, 오현식 롯데이노베이트 실장, 백지연 롯데물산 투자전략팀장 등이 직급 연한과 관계없이 임원으로 발탁됐다. 1960년생인 김송기 롯데호텔 조리연구개발실장은 올해 경북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만찬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만 65세에 상무로 승진했다.
세대교체 속도도 빨라졌다. 그룹 전체 60대 이상 임원의 절반이 이번에 물러났다. 지난해 인사에서 전체 임원 수를 13% 줄인 데 이어 올해도 상당수 퇴임자의 자리를 채우지 않아 ‘슬림한 본사·강한 현장’을 지향했다는 평가다.
안재광 기자 ahnj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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