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성장펀드 150조원도 부족하다. 금산분리 완화가 목적이 아니라 초대형 투자를 감당할 제도가 필요하다.”
지난 11월 20일 최태원 SK그룹 회장 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제2차 기업성장포럼에서 한 말이다. 이 발언은 43년간 이어져 온 금산분리 규제를 그대로 둔 채 AI와 반도체 기술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최 회장은 같은 입장을 정치권에서도 밝혔다. 개별 기업 자금만으로 조 단위 투자를 감당하는 시대는 끝났으며 글로벌 기업들은 대규모 외부 펀드를 조성해 공격적 투자를 이어간다는 설명이었다.
업계에서는 일본 소프트뱅크의 비전펀드 모델을 염두에 둔 발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소프트뱅크는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 등 외부 자금을 끌어와 비전펀드를 조성하고 이를 통해 AI·반도체 스타트업에 공격적 투자를 이어왔다.

재계가 금산분리 완화를 다시 꺼낸 배경은 단순한 규제 민원이 아니다. AI 경쟁의 판이 바뀌었고 한국의 자본조달 구조가 1980년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금산분리는 산업자본이 금융회사를 지배해 부실이 산업으로 전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 1982년 도입됐다. 대기업 지주회사가 국내 금융·보험사의 주식을 보유하지 못하도록 한 공정거래법 규정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AI 시대가 요구하는 투자 규모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글로벌 AI·반도체 경쟁에서 미국은 700조원 규모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고 일본은 민관 합작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에 2030년까지 약 45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대만 TSMC의 미국 공장 건설비는 223조원에 달한다. 한국은 HBM, 파운드리, 패키징 등 핵심 기술을 장악하고 있지만 속도와 자본력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AI·파운드리 시설 하나를 짓는 데 수십조원이 필요하고, 세대교체 주기는 점점 짧아지며, 투자 회수 기간은 길다.
재계 관계자는 “속도전에서 1~2년만 늦어도 시장 지배력이 흔들린다”고 토로한다.

앞서 샘 올트먼 오픈AI CEO는 10월 1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잇달아 만나 ‘스타게이트 메모리 반도체(HBM) 공급 파트너십’ LOI를 체결했다. 오픈AI는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위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월 90만 장(웨이퍼 기준 연간 1080만 장)의 HBM 반도체가 필요하다고 제시한 상태다.
양사가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최소 40조원 이상의 투자금이 필요하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현재 두 회사의 D램 월 공급량은 약 40만 장 수준인데 스타게이트가 요구하는 웨이퍼 기준 고성능 D램은 월 90만 장에 달해 단순 계산만으로도 설비를 2배 이상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공급 확대를 위해선 웨이퍼 1만 장당 최소 1조원 규모의 자금이 투입돼야 하고 기존 기업형 벤처캐피털(CVC)로는 감당이 힘들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이에 따라 더욱 강도 높은 자본시장 제도 완화, 즉 현행 금산분리 규제완화와 기업의 직접 펀드 운영 허용이 논의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단체는 지주회사가 자산운용사를 소유할 수 있게 해 전략산업 펀드를 조성하도록 정치권에 건의했다.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부 역시 첨단산업 경쟁력 확보 차원에서 금산분리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 제도 완화에 찬성하는 분위기다.
금산분리는 금융 지배와 부실 전이를 막는 안전장치였지만 현재 AI·반도체 초대형 시설 투자와 충돌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설비 투자를 확대해야 하지만 자본조달 방식은 여전히 1980년대 틀 안에 갇혀 있다는 지적이다.
삼성전자가 미국에선 바클레이즈와 협력해 삼성 브랜드 카드를 추진하면서도 국내에서는 금산분리·여전업법 때문에 직접 금융서비스를 내놓을 수 없는 점도 이런 구조적 괴리를 보여준다. 산업과 금융의 결합이 아예 불가능한 국내와 달리 해외에서는 이미 제조·IT·금융이 결합된 사업 모델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미국·일본·대만은 산업과 금융을 결합한 전략적 투자 모델로 수백 조원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일본 미쓰이글로벌전략연구소는 2027년 미국의 첨단 반도체 점유율이 한국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마이크론은 147조원을 투입해 메가팹 4곳을 건설하고 있으며 이는 한국의 수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과거 GE 사례가 시사하는 점도 있다. GE는 제조업 기반 기업이면서 금융 부문인 GE캐피털을 통해 산업과 금융을 결합했지만 2008년 금융위기 당시 GE캐피털 부실이 전체 기업을 위기로 몰았다. 이는 산업과 금융 결합이 전략적 투자에는 유리하지만 위험이 산업 전반으로 확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의 금산분리 완화 논의에도 경계가 필요한 이유다. 최근 금산분리 완화 논의에서 SK 지주사 체제가 부각되면서 일각에서는 ‘특정 재벌 맞춤형 완화’라는 비판도 나온다. SK그룹이 특혜 논란에 휩싸인 배경은, 규제 완화로 인한 상대적 수혜가 SK에 집중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지주사 체제를 가진 SK가 펀드를 통해 SK하이닉스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일각에서는 이를 ‘SK 맞춤형 규제 완화’로 보는 시각이 나온 것다.
경제개혁연대는 “AI 투자 확대라는 외피를 쓰고 있지만 사실상 특정 재벌 맞춤형 규제완화”라고 비판했다. 논란이 일자 최태원 회장은 “우리가 원하는 건 금산분리 완화가 아니라, 대규모 AI 투자를 감당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라며 “금산분리 완화를 요구한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재계는 “특혜 논란에 갇혀 현실적 투자가 막히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우려하고 있다.

정책당국 입장은 엇갈린다. 대통령실과 기재부·금융위·산업부는 금산분리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기류다. 이재명 대통령도 올트먼 오픈AI CEO와 회동하며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에 안전장치를 갖춘 완화는 검토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반면 공정거래위원회는 여전히 신중하다. 주병기 위원장은 “본업에 충실해야 한다”며 산업자본의 금융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다. 더불어민주당은 지주사 손자회사에만 전략산업 SPC 설립을 허용하는 방안을 제시했지만 공정위는 특별법 예외 조항으로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재계는 이러한 접근이 결국 ‘임시 땜질’에 그칠 것으로 본다. 공정거래법상의 금산분리 구조가 그대로인 상황에서 국민성장펀드가 첨단산업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한 기업 관계자는 “AI·첨단반도체 경쟁은 한번 뒤처지면 되돌리기 어렵다”며 “금융 지배 방지 원칙은 지키되 전략산업 투자에만 현실적 자금 통로를 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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