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번의 추억'이라는 인기 드라마가 있다. 80년대, 그때 그 시절 이야기다. 버스 차장이 있던 시절이다. 늘 조연이던, 차장들이 주인공인 드라마다. 드라마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필자 임모의 개인사다. 그래도 실망하지 마시라. 콤플렉스를 어떻게 강점으로 만들었는지에 관한 코칭 이야기다.
이 드라마가 아픈 기억 하나를 소환했다. 통학버스 이야기다. 통학버스라기보다는 그냥 시간대별로 운행하는 버스가 맞겠다. ‘통학’이라는 말을 쓴 것은 등하교 시간대에는 거의 학생들로 꽉 찼기 때문이다. 시골의 아침 버스는 그랬다. 대여섯 개의 마을을 거치며 읍내로 통학하는 중고등학생 2백여 명을 태우고 달렸다.
그 시절 이야기가 추억이 아니고 ‘아픈 기억’인 이유가 있다. 바로 ‘큰 키’ 때문이다. 큰 키는 나에게 큰 콤플렉스였다. 적어도 몇 가지 부분에서는 그랬다. 이 글이 ‘키 자랑’이라는 혹평도 예상돼지만 그게 아니다. 왜 콤플렉스였는지 금방 아실 것이다.
이 버스를 타고 읍내로 통학한 것은 70~80년대 중고등학교 6년간이다. 산 넘고 물 건너 걸으면 1시간 30분은 걸리는 길이었다. 그렇지만 비포장 신작로를 달리는 버스는 30분이면 족했다. 가난한 학생들에게 버스는 사치였지만, 눈비가 오거나 추운 겨울에는 절실했다.
국민학생(지금은 초등학생) 때도 나는 키가 컸다. 중학교 3학년쯤부터는 이 구식 완행버스의 천장에 머리가 닿기 시작했다. 중고등학교를 그렇게 다닌 덕에 어깨가 구부정하다. 이러니 콤플렉스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머리를 들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 바로 버스 천장의 환기구다. 냉방이 안 되는 버스 천장에는 비스듬하게 위로 열리는 사각의 환기구가 서너 개 있었다. 사방 30센티미터 크기로, 까까머리 하나는 족히 들어간다. 달리는 버스 지붕 위, 환기구로 올라온 까까머리를 상상해 보시라. 여름에는 그나마 괜찮았다. 겨울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버스가 마지막으로 학생을 태우는 마을에 살았다. 6년간 한 번도 앉아서 학교에 가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이야기가 나오던 시절로 버스에는 항상 아이들이 가득했다. 그래서 버스에 타면 차장 형이 불쌍하다며 나를 환기구 밑까지 밀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읍내까지 산을 넘어가는 비포장 신작로를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는 그야말로 곡예다.
버스 속, 까까머리 키 큰 학생은 더 요지경이다. 환기구에 박혀 있는 머리통은 끊임없이 모서리에 부딪힌다. 영락없이 요즘 길거리 식당 앞에서 춤을 추는 바람풍선 모습이다. 그렇게 30분이 지나간다. 버스는 읍내에 도착해서야 포장된 도로를 만난다. 버스 운전사 옆에 ‘오늘도 무사히’라고 쓴 기도하는 그림이 있다. 정말로 ‘오늘도 무사히’였다. 그래서 나에게 ‘큰 키’는 콤플렉스였다.
학교에서 나를 기다리는 ‘키와 관련한 더 큰 콤플렉스’가 있었다. 바로 선배들의 이유 없는 후배 선도. 말이 선도지 그냥 매서운 구타였다. 유독 많이 맞았다. 다른 학생들에 비해 행동거지가 나쁘지도 않았는데 나는 늘 선배들 구타 대상 1순위였다. 당시는 흔한 일이어서 학교도 방관했다.
왜 맞았는지 생각해 보면 이유는 딱 하나다. 교실을 급습한 못된 선배의 첫 마디, "저 뒤에 키 큰 놈, 너 나와!" 눈을 안 마주치려고 고개를 숙이면 "저 뒤에 고개 숙인 놈, 너 나와"로 바뀌었다. ‘후배 참교육’을 내세운 그들에게는 키 큰 학생을 제압하는 것이 나머지를 다루는 최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아! 오해 마시라. 후배들에게는 절대 ‘악습의 대물림’을 하지 않았음을 말해둔다.
큰 키가 콤플렉스였던 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나만 더 보태 보면 1984년 12월에 입대한 신병교육대 이야기다. 같이 입대한 동기 중 키가 가장 컸다. 그러면 신병교육대에서 자동으로 부여되는 것이 있다. 교육훈련으로 연병장에 모일 때 ‘기준’이 된다. 당시 향도로 불렸다. 다시 말해 가장 키 큰 병사를 기점으로 오와 열이 맞춰진다. 가로줄 제일 우측, 세로줄 가장 앞쪽에 선 병사가 ‘기준’이 된다. 전방의 12월은 상상 이상으로 춥다. 왜 고생인지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큰 키 콤플렉스', 이해하기 어려운 독자들이 있을 수 있다. 지금부터는 이해될 것이다. 군 제대 후 삶에 많은 자유가 주어졌다. 선배에게 맞을 일도, 버스 환기구에 머리를 맡길 일도, 연병장 집합도 없어졌다. 언제부턴가 ‘큰 키’는 나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키 큰 친구, 키 큰 선배, 키 큰 후배, 키 큰 학생…, 이런 식이다. 이름보다 큰 키를 먼저 기억하는 사람이 늘었다.
이런 영향일까. 소개할 때도 사용했다. 키 큰 놈, 임 아무개~. 이렇게 두 가지가 생겼다. 나는 웃긴 놈이 되었다. ‘키 큰 놈, 임 아무개’로 시작하는 순간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다른 하나는 대체로 다른 사람들이 더 빨리 나를 기억했다. ‘키 큰 놈’, 이 수식어가 만들어 낸 상승작용이었을 것이다. ‘키 큰 놈’은 그렇게 상징이 되었다.
이 키 큰 놈, 시리즈는 심지어 지금도 계속된다. 물론 TPO에 따라 다른 수식어가 첨가된다. 예를 들면 이렇다. 대한민국 홍보맨 중에서 키가 가장 큰 놈, 대한민국 전문 코치 중 키가 가장 큰, 이런 식이다. 이 표현, 물론 검증된 것은 아니다. 그 방법도 없다. 이런 이야기에 검증을 요구하는 리액션도 없었다. 그저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일 뿐이다. 여기저기 웃음도 계속된다.
‘키 큰 놈’ 테마는 진화했다. 이를테면 신언서판이 그렇다. '더임코치의 컨피던스 코칭' 소개 테마로 쓰고 있다. 신언서판(身言書判), 말 그대로 사람을 판단하는 4가지 기준을 이야기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예전에 사람을 판단하던 신수, 말씨, 문필, 판단력 등을 일컫는다. 여기에 해당하는 것은 ‘신(身)’ 밖에 없다. 즉, 키밖에 없다. 아전인수다. 나머지 셋은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주관적 영역이다. 그 하나로 나머지 셋까지 다 싸잡아 신언서판이 월등한 코치라고 주장한다. 이 역시 검증 방법이 없다.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저 키가 크니 저리 말하겠지 정도로 이해할 것이다. 이것도 내 생각이다.
‘키 큰 놈’. 하나는 선배들의 무차별 구타의 원인이었다. 다른 하나는 오늘의 ‘임모’를 완성하는 강점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아, 물리적 ‘큰 키’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니, 부디 오해는 마시라. 거듭 청한다. ‘키 큰 놈’, 이것이 강점 키워드가 된 과정에 주목해 달라. ‘키 큰 놈’을 콤플렉스에서 세일즈 포인트로 전환한 것이 그 첫 번째 과정이다. 못난이 삼형제가 ‘못난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과 닮았다. 그걸 앞세워 ‘임모’가 이런 사람이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두 번째 과정이다. 반딧불이가 우주에서 온 별이라고 생각하며 날고 있는 것도 이 과정이다.
그다음이 중요하다. ‘키 큰 놈’, 이 수식어를 ‘선택’한 뒤 임모는 ‘실없는 놈’이라는 소리를 듣지 말아야 했다. 자신감, 강점에 대한 책임이 뒤따랐다. ‘선택과 책임의 상승효과’는 대단했다. 대체로 ‘실없는 놈’이라는 소리는 들어 보지 못했다. 대신 그 반대의 얘기는 그래도 제법 들었다. 멋쟁이 토마토가 ‘주스가 케첩이 될 거야’라고 외치는 것에 동의하는 이치다.
정리해 보면 이렇다. 콤플렉스 덩어리였던 ‘키 큰 놈’을 인정했다. 인정하고 나니 달리 보였다. 세일즈 포인트라는 용어를 썼다. 그것을 인식하면서 실제로 그렇게 떠들고 다닌다. 확인한 바는 아니지만, 반응이 나쁘지 않다. 이제 스스로 확장한다. 본질이 확장되면 넓어지는 공간을 채워야 한다. 채우니 또 달라진다. 진화가 일어난다. 이게 강점이 자신감이 되는 컨피던스 코칭의 선순환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게 코칭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것은 셀프 코칭이었다. 강점을 계속 확장시키는 컨피던스 코칭이다. 존재를 인정하고, 그 존재를 무한 가능성의 잠재력으로 승화시키는 것, 이게 코칭의 핵심이다. 컨피던스 코칭이다. ‘존재->강점->자신감->확장->진화’의 컨피던스 코칭 사이클이 자전과 공전을 거듭한다. 작은 원자가 우주를 형성해 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더임코치의 컨피던스 코칭’은 우주로 가는 강력한 관문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더임코치/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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